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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크 Feb 23. 2024

미국에 살면 전화영어가 공짜

수화기 너머에 있는 당신도 지치고, 나도 지치고

미국에 온 지 한 달 조금 넘었을 때였나. 미국에서 살게 되면서 소소한 행정 잡무를 처리할 것이 많았다. 물론 남편은 회사에 출근을 하러 가니까 당연히 잡무는 내 몫이었다. 그 과정에서 참 한국과 다르다고 느낀 미국 문화가 몇 개 있는데, 특히 ‘전화연결’에 대해서는 얘기할 것이 참 많다. 한국은 문의를 남길 수 있는 게시판이나 실시간으로 챗봇 상담과 같은 텍스트 기반 소통 창구가 흔한 편인데, 미국은 문의할 일이 있는 경우에 전화할 수 있는 유선 번호만 떡하니 있는 경우가 많았다(물론 문의할 수 있는 이메일이 함께 있는 경우도 있다). 기껏 용기를 내서 전화하더라도 가뜩이나 영어로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전화로 소통을 하려니까 상대방도 지치고 나도 지치기 일쑤였다. 실시간으로 파파고로 번역해 가면서 어떻게든 발음을 굴려서 최선을 다해 말해봐도 상대방은 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통화 초반에 영어가 서툴다고 천천히 말해달라고 부탁해도 그러거나 말거나 솰라솰라 영어 폭포를 쏟아붓는 상담원 때문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 것 같았다. 원래도 전화하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영어로 쭈뼛쭈뼛 뭐 좀 물어보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전화를 좋아할까. 그렇다고 막상 또 전화한다고 바로 해결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원하는 서비스 번호를 듣고 누르면 대기 시간이 5분이 넘어가는 건 일상이다. 통화 연결 전에 지쳐 떨어져 나가라는 고도의 계략인지도 모르겠다. 기껏 통화 연결에 성공해서 본인 확인을 위한 온갖 개인 정보들을 다 말하고 나면 그제야 전화한 목적을 이야기하고 본격적으로 문의를 시작한다(전화 연결이라 그런지 개인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은 엄청 꼼꼼한 편). 그리고는 다른 번호로 연결을 해주겠다며 또 10분 넘게 허비하고, 새로 연결된 번호에서 앵무새처럼 본인 인증을 위한 정보들을 유창하게 반복한다. 영어 전화통화가 힘들지만 휴대폰 번호, 집 주소, 생년월일과 같은 개인 정보는 하도 많이 반복해서 꽤 자신감 있게 잘 말할 수 있다.


영어 울렁증을 극복하며 꾸역꾸역 하루에 하나씩 맡은 일을 처리해 나가는 중에 새로운 잡무가 또 떠올랐다. 미국에서 의료비가 워낙 비싸다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고 회사에서 가입해 준 해외장기체류보험밖에 없는 상태였어서 아무래도 미국에서 새로 의료보험을 가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영어로 된 사이트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이곳저곳 온라인으로 알아보면서 이상한 보험 가입 사이트에 전화번호를 한 번 남겨서 엄청난 스팸전화는 덤으로 얻었다. 참고로 미국은 가입 권유 전화도 진짜 끈질겨서 차단 밖에는 답이 없다. 다행히 공식 주정부 의료보험 가입 사이트를 찾았지만, 외국인 신분이라 회원가입과 본인 인증 절차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는 상태에 봉착했다.

며칠 동안 전화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로그인 에러 화면에 문의전화번호와 함께 안내된 장소가 있어서 구글에 찾아봤더니 차로 10분 거리로 생각보다 가까웠다. 이미 수많은 실전 무료 전화영어에 살짝 질려버렸던 터라, 오프라인 돌파구를 찾아 무작정 우버를 타고 복지 담당 부서 기관에 찾아갔다. 전화 뺑뺑이보단 낫겠지 싶은 마음에 도착한 그곳은 꽤 대기 줄이 길었다. 긴 대기가 끝나고 내 차례가 왔을 때 외국인이라 로그인 본인 인증에서 막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문의했는데, 여기에서 직접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면서 포스트잇에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주었다.


여기에 와서도 또 전화번호를 받아버렸네…하하


이 전화번호 하나 받으려고 내가 긴 대기줄에 서 있던 건 아니었는데. 전화에 지쳐서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차마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니까 그저 감사하다고 하고 남는 좌석에 자리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전화 문의를 이어 나가 보기로 했다. 수차례 통화 연결을 시도해 봤지만 영어로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결에 실패했다.

전화번호가 맞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 다시 창구 앞 긴 대기줄에 선 끝에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 순간 일부러 잘못 알려준 건 아닌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 하는 자격지심을 이겨내고 다시 전화를 걸어봤는데 다행히 아주 친절한 상담원께서 내 전화를 받으셨다. 이해하기 쉽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해 주시고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게 전화 상으로 느껴져서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다행히 그분 덕분에 외국인 인증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서브웨이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버를 타고 왔으니까 최대한 근처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한 번만 더 우버를 타고 집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브웨이는 한국에서도 많이 먹어봤어서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한국 서브웨이에서도 주문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그건 단순히 내향적인 성격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서브웨이 주문하는 게 그닥 힘들진 않았으니까. 메인 토핑과 빵 종류, 치즈 고른 후에 야채 뭐 넣을지 뺄지만 말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루트였으니까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매장에 들어서서 주문하는 곳을 쓰윽 훑어봤다. 역시, 똑같았다.

샌드위치 종류를 먼저 골라봤다. 익숙한 이탈리안비엠티가 보여서 그걸로 정했다. 다음은 빵 종류를 정하면 되는데, 여기서 첫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빵 종류가 한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이 달랐다. 왜 내가 좋아하는 ‘허니오트’는 없는 거지? 예상치 못한 빵 관문에서 그나마 익숙한 플랫브레드가 있어서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플랫브레드 별로 안 좋아하지만 처음 미국에서 주문하면서 새로운 빵까지 도전하고 싶진 않았다.

자, 그다음은 이제 치즈를 골라보자. 치즈도 한국보다 종류가 많았지만 자주 먹던 슈레드가 있어서 그걸로 간단히 주문 완료. 빵 데우기 관문까지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듯했다.

이탈리안비엠티 토핑을 다 넣은 후에 서버가 야채 어떻게 넣을지 물어봤다. 할라피뇨 빼고 전부 다 넣어달라고 하고 싶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쭈뼛대면서 자신 없게 발음하면 더 못 알아듣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평소답지 않게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혀를 최대한 굴려보기로 했다.


“All.. All, Please!”




ALL이 OIL이 되는 마법의 순간



서버는 잠깐 망설이다가 거의 다 완성된 이탈리안 비엠티 샌드위치에 올리브 오일을 골고루 뿌리기 시작했다. 좀 의아했지만, 미국식 이탈리안 비엠티에는 올리브유가 들어가나 보다 하고 자연스럽게 지켜보던 와중에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All을 Oil이라고 들었구나…!’


계속 뿌려지는 올리브유를 멈추고 싶었다. 내 이탈리안 비엠티를 오일로 계속 뒤덮이게 할 수 없었다.


“Not oil, I mean ALL vegetables!”


서버가 다급한 말을 듣고 즉시 오일 뿌리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꽤 흥건해진 상황. 순간 또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일까 싶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했다. 오늘따라 참 되는 일이 없다. 처음으로 미국 시골에서 우버를 타고 밖에 나왔더니 오일 범벅 된 서브웨이를 먹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새로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서버는 전혀 귀찮아하는 내색이 없었고, 그저 벌어진 이 상황이 조금 웃긴 것 같았다.


‘아, 인종차별이 아니었구나’


생각보다 엄청 쿨하게 다시 샌드위치를 처음부터 만들어주는 서버가 엄청 고마웠다.


‘새로 안 만들어주면 어떡하지’

‘오일이 들어간 샌드위치 맛이 의외로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이렇게 애써 자기 위안을 하고 있던 나한테는 엄청난 감동이었다. 사실 보통 음식점에서 소통이 잘못되어 오더가 잘못 들어갔으면 다시 만들어주는 게 당연한 건데, 괜히 내가 미국에 와서 주눅이 들어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괜히 발음이 너무 굴려서 이런 상황이 생겼다는 살짝의 죄책감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처음부터 빵을 데우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줄 동안, 아까의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봤다.


‘All이라고 하지 말고 Everything이라고 했으면 서로 헷갈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


다음에 서브웨이에 간다면 어설프게 발음 굴리지 말고 'Everything'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셀프 결론을 내렸다.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내 영어 발음에 더욱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아서 아예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원천차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 미국에서 주문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었더니 시간이 잘 갔다. 보험 사이트 로그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밖으로 나온 거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아파트 단지 밖으로 우버 타고 나와서 미국 시골동네에서 나름 첫 홀로서기 사회생활(?)을 한 의미 있는 날이었다. 나중에 친구한테 이 황당하고 웃픈 상황을 얘기했더니 본인은 한국에서도 서브웨이 주문하는 게 어려워서 잘 안 가게 된다고 되려 말해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단순한 오해로 벌어진 해프닝이지만 오해의 원인에 내 과도한 혀 굴림이 충분히 한몫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괜히 평소보다 혀를 막 굴려가면서 말했더니 될 것도 안 된 느낌이라 오버한 것 같다는 느낌이 말하면서 들었으니까. 그래도 친구의 위로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한국에서도 어려운 서브웨이 주문을 미국에서 한 것 자체가 대단하지!’

‘설령 내 발음이 이상했어도 원어민이 못 알아들은 잘못도 있는 거야’


또 나의 주특기가 발동됐다. 나는 엄청난 합리주의자이자 긍정주의자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웃어 넘기기로 했다.


‘혼자 밖에 나가서 맛있는 샌드위치 사 먹었으면 됐지 뭐. 미국에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생기고 좋네.’



우버가 안 잡혀서 한 시간을 걸어가느라 다리는 좀 아팠지만 하늘이 예쁘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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