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사랑해 마지않는 혜수
장마가 끝난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네. 추위를 유독 잘 타는 너인데 한 번도 온 적 없단 듯 뻔뻔히 내리는 빗방울이 괜스레 더 차갑게 느껴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맑은 날엔 잘도 맑은 널 알아서 흐린 오늘이 원망스럽네. 요즘 너의 날씨는 어때?
얼마 전 만난 네가 답잖게 성숙해 적잖이 놀랐어. 또, 여전히 아꼬운 네 얼굴 위 모질게도 피어난 슬픔 곰팡이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었네. 토끼처럼 동그란 눈망울이 한껏 붉어지고 세모난 입이 움찔거리는데 나는 이다지도 무용한 사람이라는 게 속상했어. 수줍고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유난히 작은 너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손 잡아줄 기회는 참 많았던 것 같은데 매번 그러지 못한 것 같아. 괜히 툭 툭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물에 반쯤 잠긴 너에게 어거지로 구명조끼를 입히곤 뭍으로 이끌었지. 기억나? 네가 꽤나 도발적인 일상을 보냈던 걸 얘기하면서 너의 별명을 '해수'라 지었잖아, '심해수'. 아주 바닥까지 보였다면서. 놀리듯 꺼내던 너의 별명인데, 요즘 가슴이 터질 만큼 헤엄치다 숨구멍 찾기에 급급한 너를 보니 어느새 내 맘 속 금기어로 자리 잡았지.
나는 이제야 너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언제 화가 나는지, 무엇에 슬픈지, 슬픔을 어떻게 잠재우는지... 아마 너도 말한 적 있다시피 우리가 일정 부분을 닮아있어서일 테야. 알고 보면 여리고, 정 많고, 쓸데없는 완벽주의자에 신기한 고집이 있지. 가끔 제 멋대로지만 결코 선을 넘진 못하고, 타인에 무심해 보여도 결코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우리. 네 아픔의 일부는 내 아픔의 일부를 닮았고, 내 좌절의 모양은 네 좌절의 모양을 닮았어. 그거 알아? 생각해 보면 너와 나는 좋아하는 남자 취향 빼곤 대부분 비슷해!
그래서 내가 아는 그 고통을 너 역시 너만의 모양과 무게로 겪고 있단 것이 참 가엽고 아리다. 가끔 네 하루가 땅 밑으로 꺼져버렸단 말을 들으면 디저트나 커피 같은 것들을 선물했는데, 가당키나 했을까. 감정을 얼려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쪽으로 열리는 큰 냉동고에 칸칸이 정리할 수 있는 밀폐용기가 가득한 거야. 어느 날 맛있는 걸 먹는데 너무 행복하면 그 행복의 일부를 떼어 용기에 담아 얼려버리는 거지. 그러면 어느 날 직장 상사가 느닷없이 지랄해서 짜증이 날 때, 얼려놓은 행복을 조금 먹는 거야. 이런 건 어때? 오늘의 슬픔을 얼려두었다가 나를 만나는 날 슬픔을 해동해 먹고 펑펑 울며 없애버리는 거야. 감정을 묵히면 해동시키는 데에 더 긴 시간이 드니까, 슬픔, 좌절, 죄책감, 부끄러움 같은 감정은 나와 함께 빨리 녹여 없애버리자. 그러면 우리 더 자주 볼 수 있으니 또 얼마나 좋니.
너 자신마저 눈치채 버릴 만큼 쇠약해진 마음이니 '혼자 이겨내려고 하지 마'라는 식상한 말은 접어둘까. 온갖 투정과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가감 없이 거침없이 뱉고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라는 한껏 다정 부린 말도 조금 뻔하지. 이런 말 보다 내가 널 많이 아낀다고 두 번 세 번 더 전하겠어. 같이 있을 때 행복하다고, 너와 친구임에 감사하다고.
몇 년 전 같이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찍어둔 브이로그를 보며 '언니, 우리 저 땐 정말 잘 웃었네. 지금이랑 다르네' 하는 너. '그러게, 잘도 웃네' 하며 함께 거슬러 올라간 시간 속 우리는 사실 전혀 다르지 않더라. 그래, 우리 조금은 차분해졌지. 어쩌면 아주 많이 재미없어졌지. 덜 낭만적이고 더 소심해졌지.
그런데 있잖아, 그때의 우리도 지금의 우리도 똑같이 불안한 사람들이다.
또, 한결같이 웃는 건 쉽고 우는 건 어려운 사람들이고.
저기 깊은 곳의 우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어, 무성한 가시덩굴을 헤치고 또 헤쳐,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른 우리는 그저 나약한 사람일까.
그랬다면 우리, 지금, 여기에 있을까.
구태여 재미있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니.
언젠가 네가 또 현실을 도피하자며 서울을 벗어나게 된다면,
나는 너와의 침묵을 '고요'라 말하고, 너와의 현실을 '낭만'이라 이름 지을 테니
우리 언제든 낭만 있게 고요할 수 있으면 그걸로 괜찮지 않니.
네가 말하는 '괜찮은 너'가 어떤 모습의 너인지 나는 알지 못해.
나에게 너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었으니까. 나보다도 훨씬 더.
하지만 고집쟁이인 너는 기어코 괜찮은 상태의 너를 찾으려 애쓰겠지.
그러면 나는 두 말 않고 응원할래. 어떤 모양의 네가 되든 그저 옆에 있으련다.
그리고 몇 년 후 오늘을 되돌아볼 때
'언니, 우리 저 땐 정말 힘들었네. 지금이랑 다르네'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