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이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바람에 실려오는 설레면서도 아련한 향기에 멈칫한다. 멈춘 내 발 끝엔 라일락이 한아름 피어 있다. 봄에 피는 꽃 중엔 벚꽃이 당연 1등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잠깐 그 1위 자리에 라일락을 두게 된 적이 있었다.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겨울 방학 때였다.
눈 오는 날임에도 학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잔뜩 화가 난 채 학원에 도착했을 때, 노란 우산을 든 남학생이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으아, 오늘 다들 나를 짜증 나게 만드려고 작정을 했나... 한껏 인상을 꾸기며 “잠깐 비켜주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아이는 미안하다고 하며 비켜섰고, 나는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슬쩍 뒤돌아보았다.
‘무슨 남자애가 노란 우산을 들고 다니냐....’
픽사베이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 뒤를 쫓아 들어오는 그 노란 우산?! 하필 내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 아이는 내 짝꿍이 되었다. 어차피 한 달 후면 자리를 바꿀 테니, 첫인상이 별로였던 그 아이와는 굳이 친해지지 않기로 했다.
짝꿍이 바뀌고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학원이 끝나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잘 버텼다고 셀프 칭찬을 하며 고개를 숙인 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였다.
“너는 어떻게 된 게... 참나... 매번 내가 너 뒤를 쫓아가는데, 한 번을 안 돌아보냐?”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잠깐 서 있는 사이 그 아이는 내 옆으로 뛰어왔다. 그날 처음으로, 숨 막히는 어색함을 버티며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 이후로 나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아이가 없는 날보다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그 아이와 같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나는 그 아이의 옆에서 떨어진 벚꽃잎들을 발로 차면서 걷고 있었다.
“대학 가면 한 번은 수업을 땡땡이치고 벚꽃 구경하러 갈 거야!”
어디로 벚꽃 구경을 하러 갈 것이고, 누구랑 갈 것인지, 또 어떤 옷을 입고 갈 것인지 등등 한참을 떠들어댔다.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그 아이가 갑자기,
“우리 한 정거장만 걸어가 볼래?”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의아했지만 충분히 즐기지 못했는데 벚꽃이 다 져버려서 생긴 아쉬움에, 대신 떨어진 벚꽃잎이라도 즐겨볼까 싶어 그러자고 했다. 매번 지나가는 길이지만 버스를 타고 빠르게 지나갔던 터라 천천히 걸어가며 보는 그 거리의 풍경은 생경했다. 이 얘기 저 얘기 떠들면서 걸어가는데, 코끝을 스쳐 지나간 향기에 멈칫했다.
"오! 이 향기 뭐지?"
그 아이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에 라일락이 한아름 펴 있었다. 라일락이란 꽃은 알고 있음에도 라일락 향기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한심했다. 짧은 숨을 빠르게 내쉬고 마시며 라일락 향기를 한껏 내 몸 안으로 넣었다.
“나는 벚꽃보다는 라일락이 더 좋더라.
그래서 나는 벚꽃이 잔뜩 펴있는 곳보다는 라일락 한가득 펴있는 곳에 갈 거야.”
라일락 향기를 한가득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설레는 마음을 가득 담아 나에게 말을 하는,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그곳에 나와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라일락 향기에 취해서 그런가, 갑자기 라일락이 좋아져서 그런가, 아니면 그 아이가 좋아져서 그런가? 설마 내가 저 이상한 아이를 좋아할리는 없으니 라일락이 좋아져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라 결론지으며,
주체할 수 없이 마구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