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어 학원을 그만두었다.
마지막 날까지 그 아이에게 더 이상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말하지 못한 것이 더 맞겠지.
마지막 날, 나는 서둘러 가방을 싸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일락이 폈던 곳까지 걸어가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그 아이는 없었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두 대의 버스를 보내고, 세 번째 온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갔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더라면, 그 아이와 함께 했을 텐데.
내가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서, 다 나 때문인데,
혼자 그 아이에게 서운해하는 모습이 한없이 한심했다.
하지만 서운했다.
픽사베이 다다음 날, 그 아이에게 문자가 왔다.
(그) : 왜 학원 안 와?
(나) : 나 그만 둠. 이제 안 감.
이 문자를 시작으로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았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문자로라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오히려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마음 졸이며 대화하지 않아도 돼서 더 다행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문자를 주고받았고, 어느덧 수능이 끝났다.
(그) : 우리 수능도 끝났는데 만날래?
심장이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올라오기를 몇 번,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문자를 보냈다.
(나) : 그래, 좋아!! 언제 볼래?
크리스마스보다 더 떨리고, 수능보다 덜 떨려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전전날,
(그) : 미안한데... 우리 만나기로 한 그날 있잖아.
여자친구가 어디 가고 싶다고 하네.
우리 그다음 날 만나도 될까?
(나) : 음... 그다음 날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
그럼 다음에 시간 맞을 때 만나자!!
그 문자를 끝으로, 나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머릿속은 점점 새햐얘지고, 마음속은 점점 새까매졌다.
한 몸에서 일어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나를 온통 회색으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또 그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김없이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한 번은 서운하고, 서럽고, 비참했다. 그러다가 문득, 따지고 보면 나는 그 아이에게 그저 친구일 뿐이니, 여자친구를 먼저 챙기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뜨는 화면을 마주하면 또 서럽고, 서운하고, 비참해졌다.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감정은 결국, '수신 거부'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만약 그 아이에게 내가 좋아한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비쳤더라면 어땠을까?
나를 좋아해 줬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를 좋아해 주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나에게 예의상 약속을 미루는 이유로 여자친구 때문이라고 안 하지 않았을까?
그럼 난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텐데, 그럼 덜 상처받았을 텐데...
결국 내가 마음을 꽁꽁 숨겼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 또 나 때문이구나.
그래도 서운해.
그때는 그 아이가 나와의 약속을 미룬 다는 것보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았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란 말이 이런 순간에 쓰이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상황들을 겪으며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게 4월,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기 전 우산의 물기를 털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 내 눈에 순간 들어온 그 사람.
담배꽁초를 발로 비비며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 사람.
장대비가 내리는 탓에 시야가 뿌옇게 흐렸지만,
나는 한순간에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