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잊쑤 Oct 26. 2024

4월:이젠 잊어야 할, 라일락 (4)

Abril : 차라리 드라마였더라면, 바로 꺼버렸을 그날의 이야기

봄비가 이리 거세게 내리다니.

아직 해사하게 펴있는 벚꽃들에게,

이제는 다른 봄꽃들이 주목을 받아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이 봄비가 쏟아진다.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기 위해 사람들이 별로 없던 흡연 구역 쪽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 우산을 접자,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사람.

담배꽁초를 발로 비비며 핸드폰을 보고 있던 그 사람.

그 아이였다.

 

흡연 구역과 개찰구가 가까웠기에 그는 우산을 쓰지 않고, 나를 스쳐, 개찰구로 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한 상태로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만약 그가 나와 같은 플랫폼으로 간다면, 이건 운명이지 않을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내어, 내가 가려고 하는 플랫폼에 도착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는 10-5

그 아이가 있는지 살펴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승강장 의자 옆에 서 있는 그를 찾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그 아이임을 확신했지만,

6년이란 세월이 지났기에  좀 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앞을 지나가며 명찰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빨간 명찰에 노란색으로 쓰인 이름,

그 이름이 맞았다.


나는 그 아이가 서 있는 승강장 의자에 앉았다. 그때는 차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우산을 바닥에 콩콩 쳐보기도 하고,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다음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그는 지하철을 탈 준비를 했고, 나는 금방이라도 그 아이의 군복 끝자락을 잡아끌 기세였다. 하지만 옷끝자락 대신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록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는 차마 그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승강장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 아이와의 추억이 사라져 버릴까 봐, 때마다 추억들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추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품고 흘러가버렸다. 그럴 때면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꼭 쥐고 있는 조각들이 떠내려가지 않게 더 열심히 되뇌고 되뇌었다.


하지만 지하철역에서 만난 그 아이에게는 나와의 추억이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 아이가 교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있더라도,

나는 그 아이가 더 이상 노란 우산이 아닌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도,

나는 그 아이에게 라일락 향기 대신 담배 냄새가 풍기더라도,

한 번에 그임을 알아보았는데,

그는 나를 끝까지 알아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 모든 일들이 드라마였더라면,

나는 6년 전 겨울 이야기를 한 회차까지만 봤을 것이다.

그 회차까지는 그저 슬픔만 있었을 테니까.

오늘의 이 회차에선 슬픔뿐만 아니라 허탈감, 허무함, 실망감, 씁쓸함...

온갖 마음에 생채기가 생기는 감정들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 승강장 의자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내 손을 펴서 손에 쥐고 있던 조각들도

시간에 떠내려 보내야 할 때라는 것을.












이전 09화 4월:이젠 잊어야 할, 라일락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