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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그레이 Jun 26. 2024

암흑 속에서 두서없이 헤매는 두더지의 40년 기억

혹은 물길 속을 정처 없이 떠도는 물고기의 40년

가끔 내 삶이 두더지나 물고기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반짝이는 맑은 물의 수원지에서 힘차게 헤엄치며 평생 살 줄 알았더니, 어느 순간 흐름에 저항할 힘을 잃은 물고기 같기도 하고, 나이를 먹고 또 먹어도 철들지 못한 채 대책 없이 방향 잃은 굴을 파는 것이 굶주린 두더지 같기도 하다. 


물고기처럼, 두더지처럼 40년을 살아왔다. 태생이 한량이라 인생 앞에 마냥 태만하고 자만하기까지 했는데,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빈손이다. 삶의 밀도가 공기보다 낮은 것 같다. 코앞에 임박한 새로운 시대는 약간의 공포감까지 느껴지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생각하면 섬짓해지기도 한다.


그간 걸어온 길이 물길이든 땅굴이든 간에 여기까지 오면서 스친 정말 사소한 순간들이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대부분은 사람도 아니며 부질없게 작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그중 어떤 것들은 특별히 날카롭고 아름다운 유리조각이 되어 내 의식 깊이 꽂혀있는 느낌도 든다. 다 같이 모아서 보면 스테인드글라스같이 예쁠 것 같지만 대부분 애처롭고 아릿하기에 슬픈 그림이 될지도 모른다. 


내 삶과 별 연관도 없는 이 조각들은 가장 오래된 것이 삼십 년을 훌쩍 넘었으니 슬슬 사라질 만도 한데, 도무지 풍화되지가 않는다. 평상시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한순간 미미한 자극만으로도 눈앞에 훅 떠올라버린다. 비나 오래된 종이 냄새, 내리쬐는 햇살, 겨울 아침 냄새 같은 것들이 기폭제가 된다. 그러면 잠시 먹먹하거나 후회가 동반되기도 한다. 역시 즐겁고 신나는 기억보다 슬프고 괴로운 기억이 더 생명이 길다. 그래서 인생은 시간을 더할수록 무거워지나 보다. 


이 맴도는 기억들을 글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3년도 훌쩍 넘었는데 이제야 시도한다. 


작고 부질없는 것에 이토록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경쟁 사회에서 영 맥을 못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군다나 집안의 불량채권이다 보니 탐탁히 않게 여기는 부모님에게 핀잔도 종종 듣는다. 한때는 부모님에게 이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기대를 갖게 했지만 십여 년에 걸쳐 그것을 지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해 버렸으니... 내 앞날 걱정에 잠 못 이루거나 나에게 실망을 쏟아내는 엄마를 볼 때면 엄마 스스로 만든 고통이라 여기면서도 역시 제1의 원인은 인생을 우왕좌왕하며 흘려보낸 내 업보라고 생각한다. 방종했던 나를 부모님은 내내 지지해 줬다. 몇 번이고 전공을 바꿔도 밀어줬다. 예술로 유학 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음에도 결국 허락해 줬으며 만 리 타향에서 밥 굶고 다니지 않도록 살펴주었다. 나라는 인간의 자질에 넘치게 큰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뚝 멈춰 정체했던 세월이 길다 보니 미뤄둔 책임도 빚처럼 불어나버려 미미하나마 정신 차린 지금 쉬이 청산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방랑하고 돌아보니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배운 것은 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딱 한 발자국 앞, 내일 정도는 조금 헤아릴 수가 있다는 것인데, 나의 오늘이 내일의 내가 걷는 길 일부가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그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제부터라도 오늘 이 순간을 잘 채워서 뒤로 넘기자. 그리고 머릿속 다락방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작은 추억들을 끌어올려 잘 닦아주고자 한다. 이 지구에서는 인간도 이렇게 작은데 작은 것들을 기억해 주는 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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