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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그레이 Jul 15. 2024

초여름날 숭례문을 바라보며 먹었던 알감자구이 한 대접

무더위는 싫어하지만 외투를 입지 않아도 안온한 공기의 초여름은 좋아한다. 오래전, 도미를 앞두고 환상적인 날씨가 이어지던 그 시기에,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기 위해 고궁과 박물관들, 오래된 마을의 좁은 골목들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광화문 일대를 자주 돌게 되었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출출해지면 간단히 요기를 하던 기억이 지금도 그 동네를 지날 때 종종 떠오른다. 이젠 어디서도 먹을 수 없어 더 추억에 잠긴다. 



사라진 김밥 고수의 가게 


가장 만만하게 갔던 집은 혼자 노는 재미를 깨치던 스무 살 즈음부터 단골이었던 김밥집인데, 교보문고 안 푸드코트 '멜로디스'에 있었다. 나름 김밥 미식가인 내 입에도 독보적인 공력이 느껴진 김밥이었는데 나만 아는 것이 아니었던지 평일 점심시간에 가게 되면 정장 입은 직장인들이 주욱 늘어선 꽁지에 서야 했다. 주방엔 김밥을 내는 접시가 태산같이 쌓여있었다. 


출국 전 서점이 큰 공사에 들어가 더는 맛보지 못한 채 떠났는데, 몇 년 뒤 돌아와서 보니 종로 쪽 입구가 크게 바뀌었다. 천장 가득 비 내리듯 달려 있던 장식과 푸드코트는 사라져 있었다. 어릴 때 콩닥거리며 내려갔던 계단(책을 정말 좋아했다), 황홀하게 반짝이던 천장(태어나 처음 본 ‘장식된 천장’이었고), 그리고 '그 김밥'이 없어져버렸다. 


그래도 천장 장식은 어딘가에 살그머니 남겨져 있긴 하다. 마치 이스터 에그처럼. 물론 지금 와서 옛날의 천장이나 계단을 다시 봐도 그 시절의 벅찬 감흥은 없을 것이다. 새로운 책에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던 어린이 시절은 오래 전에 끝났다. 푸드코트도 구식 그대로 계속 운영할 수 없었겠지. 그래도 아쉬웠다. 김밥 만드시던 조리사님들은 잘 계실까.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한 번 마주친 알감자 포장마차


때로는 눈에 띄는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기도 했다. 사대문 안 어디든 걷고 있노라면 참 오래 있었겠다 싶은 작은 가게들이 많았다. 조금만 낡아도 밀어버리는 도시라 더욱 애틋하게. 평점 매기는 앱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라 더욱 망설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길거리 포장마차 군것질에도 종종 넘어가곤 했다. 교보빌딩 뒷골목에서 팔던 꽈배기 도넛이 생각난다.


하루는 숭례문 쪽으로 방황하러 갔다. 햇살은 쨍하고 다소 무더웠다. 배가 출출한 채 포장마차들이 모인 길을 지나가다가 알감자구이를 수북히 쌓아놓은 가게를 발견했다. 제철이어서인지 배고파서인지 껍질이 유달리 반지르르해보였다. 식사 때가 아니라 손님은 없었고 주인아주머니는 달아오른 대기를 두른 채 불 앞에서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옆에 딸로 보이는 한 학생이 일을 거들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알감자 일 인분을 주문했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으시더니 종이 대접에 알감자를 가득 담으시는데, 분명 팔던 양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산더미처럼 담으셨다. 고작 삼천 원 남짓이었는데 그렇게 안 보일 정도로. 멈추지 않는 손길에 깜짝 놀라서 ‘정말 많아요!’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아주머니는 끝까지 돌탑처럼 쌓아 올리고서야 웃으며 건네주셨다. 내가 마수걸이 첫 손님이었던 걸까? 알감자 재고가 많았던 걸까?


근처에 앉아 한 알씩 먹었다. 잘 익은 알감자는 포슬포슬... 사실 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배가 터지도록 불렀고, 이상하게 조금 슬펐다. 우리 엄마가 포장마차 주인이었다면 나도 가서 거들었겠지. 엄마의 땀을 조금이라도 나누었겠지. 아, 나는 그 딸이 마음에 걸렸구나. 무더위에도 학교에서 바로 달려와 엄마를 거들던 십 대 소녀. 


지금 숭례문 주변 지도를 살펴보면 그 노점상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감이 안 잡힌다. 길의 일부가 기억이 나는데 겹쳐 보이는 곳이 없다. 그새 인도 정비라도 했나 싶다. 주변 포장마차들은 다 없어진 것 같다. 도시 전설마냥 배고픈 사람 눈에만 보이는 가게도 아니었는데 위치를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초록빛 그늘 사이로 여름 햇살이 쏟아지던 가로수길, 후텁지근했던 공기, 너무 묵직했던 알감자 한 접시... 그런 것들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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