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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그레이 Jul 15. 2024

칼을 팔 가게를 찾던 노인

초등학생 때였다. 아마 1, 2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심부름하던 중이었는지 혼자서 아파트 단지 입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여기 음식 파는 가게들 있니? 하고.


주위가 약간 노릇하고 공기가 데워져 있었으니 더워지는 시기의 늦은 오후였던 것 같다. 그는 작업복 같은 푸르스름한 옷차림에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큰 키로 구부정하게 서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지쳐 보였다.


처음 들어보는 질문을 내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자 노인은 먹을 것 파는 가게 없니? 식칼이 필요한 집 있잖아, 하고 다시 물어왔다. 나는 상가 건물을 속으로 짚어보았다.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는 요새 같이 대규모도 아니었고 동네 상가도 일자 복도가 금방 끝나는 작은 건물이었다. 1층에는 서점, 약국, 인테리어집, 빵집, 음반 가게, 안경원, 치킨집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2층에는 치과와 학원들이 있던 것이 기억난다. 지하층 전체는 마트였다. 건물 밖에 그 마트로 바로 내려가는 비탈식 통로가 나 있었고, 통로 끝에서 꺾어 매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말 작은 공간이 있었다. 1평은 되었을까 싶다. 내가 작았던 시절에 작아 보였으니 정말 작았을 것이다. 거기에 분식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운영하셨던 아주 작은 떡볶이집. 전면에 떡볶이가 항상 한 바닥 끓고 있었고 통로에는 벌겋고 진득한 떡볶이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순대, 어묵, 쥐포도 있었던 것 같다. 주부들이 장을 보면서 종종 간식거리를 사가곤 했다.


치킨집은 길에서 바로 볼 수 있었으니 그 집을 제외하고 칼을 쓸 만한 가게라고는 분식점뿐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가리키며 "여기 내려가시면 떡볶이집이 있어요!" 하고 알려드렸다. 할아버지는 그쪽으로 향했고 나는 가던 길을 다시 갔다. 내 볼일은 지척에서 금세 끝났고 ㅡ 무슨 심부름 중이었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ㅡ 바로 돌아와 통로 입구를 지나게 되었다. 입구는 훤히 트여 있어 분식점까지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그가 아직 있었다. 분식점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다소 난처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방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처음 보는 어른의 처음 보는 상황을 추리하는데 약간의 숙고가 필요한 나이였다. 식칼을 팔고자 하는 짐이 무거워 보이던 할아버지. 무거워 보이던 가방에는 새 식칼들이 가득 담겨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직접 다 갈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식당이 많이 모여있는 상가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변두리 동네엔 마땅한 식당도 없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을까. 이 동네는 초행인 듯했는데, 큰길에서 두 상가 건물이 마주한 것을 보고 버스에서 내렸을지도 모른다. 건너편 상가도 이쪽 건물만큼 작고 식당이랄 것은 자그마한 김밥집 말고는 없었다. 그는 멀리서부터 걸어왔을 수도 있겠다. 내가 가리킨 지하로 내려가서 기운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칼을 사셨을까? 


집 앞에 다 와서야 옆 동네의 거대한 은마 상가를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재건축 문제로 종종 화제가 되고 있는 그 대단지의 상가. 우리 동네 건물은 수 십 채 들어가고도 남을 거대한 상가였다. 엄마와 함께 거기서 장을 보기도 했는데, 지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분식집, 백반집, 전집, 떡집들이 모여 항상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떡집만 다섯 군데는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채소가게, 생선가게, 곡물가게, 기름집, 철물점, 수선집과 수입상들... 어린이에겐 별세계였다. 가게마다 들쭉날쭉 달린 백열등들이 훤하게 머리 위를 어지럽혔고 통로도 미로처럼 나있어서 엄마 손을 놓치면 미아 되기 십상이었다. 거기라면 칼을 사줄 집이 하나는 있을 것이었다. 버스 노선도 몰랐고, 당시 내 기준으로는 아주 먼 거리여서 염려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곳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되돌아갔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동네에서 십 년은 더 살면서, 그날의 기억이 문득문득 났다. 그의 얼굴은 애저녁에 잊어버렸지만 그의 지친 기색과 목소리, 그럼에도 발품을 팔던 모습의 잔상이 어린아이의 마음 한 구석에 진한 인을 남겼다. 무더웠던 그날, 누군가 그 할아버지에게 옆 동네에 커다란 상가가 있다고 알려드렸기를. 칼도 많이 팔고 발걸음 가볍게 귀가하셨기를.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지금까지도 종종 그렇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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