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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혜 Nov 21. 2019

독일에서 프랑스로, 박사과정 첫 출근기

툴루즈 집순이의 첫 박사과정 출근기


(이 글은 10월 29일에 처음 쓴 글을 옮겨온 글이에요.)


서울에서 5개월을 아주 알차게 보낸 뒤, 유럽에 돌아와서 10월 초부터 박사과정생으로 연구실 출근을 시작했어요! 서울의 시간은 유럽보다 늘 더 빠르고 많은 것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럽에 가면 바로 뉴스레터처럼 소식을 써서 보내야지 했는데 막상 쓸려니 무슨 얘기를 하지 싶기도 하고, 뭣보다 어떤 분들을 독자(?)로 설정하고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블로그 쓰는 것과는 또 기분이 다른데 어떻게 달라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사진보다 글이 많은 차이일까요. 일단 오늘은 현재 소소한 일상을 주저리주저리 나누는 걸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즘은 집-연구소-장보기를 반복하며 단순하게 살고 있어요. 주중엔 집-연구소, 주말 1일은 집-장보기, 나머지 하루는 집. 음식 외의 물건을 사는 ‘쇼핑’은 거의 할 일이 없는 게, 이미 가진 옷과 주방용품 등 잡다한 물건들을 서울에서 조금, 독일에서 조금 가져오고 쉐어하우스에 들어와 살다 보니 크게 새로 필요한 물건이 없어서, 첫 주말에 옷걸이와 수납박스와 김치통을 사러 갔을 때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네요. 아 중고 자전거 거래하러 간 거랑. 새로 물건을 최대한 안 사려고 하다 보니, 서울과 독일에서 부친 짐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조금 부족했던 건 좀 참고 살았죠 (조리용 가위, 자전거 짐 고정용 케이블, 요가매트, 운동화, 거울, 메모리폼  베개 등). 조리용 가위 없이 사는 건 좀 힘들었네요…  개인적 부엌 필수템은 좋은 칼, 널찍한 도마, 조리용 가위, 그리고 실리콘 주걱.


간혹 심심하지 않냐고 걱정해 주는 분들이 있는데 집순이라서 그런가 전혀 하나도 심심하지 않고 그렇다고 바쁘지도 않은 딱 좋은  일상이에요. 출퇴근하며 팟캐스트를 듣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인데 이제야 발견한 듣똑라는 쌓여 있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은데,  제가 듣는 속도(하루 1시간)가 업로드되는 속도(주 5 에피소드 이상, 각 1시간 이상..)를 절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너무  즐겁게 듣는 동시에 약간 절망하고 있어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겠구나... 싶은. 비폭력대화 팟캐스트를 다 들어버렸을 땐 새로  업데이트되는 게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는데.. 적어도 고민 많아도 고민.


여하튼,  출근과 장 보는 것 외에는 집순이 게이지를 가득 충전하고 있고, 저희 집 발코니 전망이 아주 예뻐서(위 사진) 추워지기 전에  맘껏 즐겨야지 싶지만 사실 매일 비슷하니까 매일 나가진 않네요. 집에 초대해서 전망 구경시켜주고 밥 해줄 동네 친구가 없다는 게 좀  아쉬운데..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아주 친절히 알려주고 소소한 수다도 할 수 있는 플랫 메이트가 1인 있고, 연구소에서 같이 점심  먹고 궁금한 거 언제든 물어볼 동료들이 몇 명 있고, 또 친구를 만드는 것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잖아요. 친구 만들기 위해 어딘가를  나가거나 무언가를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빠져나가는 에너지 vs 친구가 놀러 와서 밥 해줘서 아끼는  에너지 + 수다 떨어서 채워지는 에너지(사람과 상황에 따라 마이너스 일 수도 있음)를 비교했을 때 아직은 앞에 에너지가 월등히  많이 들고 딱히 아쉬울 게 없어서 일단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쓰고 며칠 뒤에 연구실 동료들이 집에 놀러 와서 밥 해 줘서 먹고, 쇼핑하는 것도 따라가 봤는데, 밥도 맛있고 재밌었지만 기가 빨려.. 애들 가고 뻗어서 낮잠을 세 시간이나 잠.


일단, 자는 시간보다도 더, 주중엔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연구소의 일상을 소개하자면..


수년만에 월-금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연구실에 자리가 있고 매일 출퇴근하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너무 좋아!! (6개월 뒤에 다시 물어봐주세요)  너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출근의 목적이 “일”이 아니라 “연구”고, 이제 막 시작한 거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과 “매일매일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 및 "마감시한" 이 아직 없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긴 해요. 그리고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자신의 생체리듬과 그날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정해도 되는 점도 좋은 것 같아요. 아침 회의가 있는 게 아니라면 보통  8-10시 사이에 출근, 퇴근은 6-8시 사이에 하더라고요. 놀랍지 않게도 저는 그 스펙트럼의 가장 오른쪽(?) 시간에 출근하여  오른쪽 시간에 퇴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8시 반에 회의가 있는 월요일 아침은 너무 힘들어요.. 7시 반에 일어나야 하다니. 그리고 일단 사무실 오면 좋은데 집을 나서는 건 8시는커녕 9시에 나서도 왠지 쉽지 않음.


아침 시간의 어려움이야 어찌 되었든 연구실에 있는 것 자체는 만족스러우니 의외로 적당히 규칙적인 생활과 사무실 생활이 안 맞지는 않는 사람인가 봐요. 혼자 있으면 늘어지는 편이니 일하는 공간과 늘어지는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게 당연한 거 같기는 하네요. 독일에서 석사 공부할  때는 도서관이나 카페를 가면 공부가 더 잘 되고 논문 쓸 때 연구실에 자리가 생기긴 했었지만 와도 되고  안 와도 된다 그러면 저는 잘 안 가는 사람이더라고요. 친구들이랑 도서관 가기 약속을 만들어서 그나마 좀 가긴 했었지만 그건 무조건  가야 되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연구실 자리가 있고 출근을 규칙적(?)으로 하게 되어서 좋다고요. 그러고 보면 제가 인생 최대  효율을 낸 것도 자습실+기숙사 콤보의 고등학교 때였던 듯.


뉴스레터도 써야지 써야지, 영상 편집도 해야지 해야지 했으나 집에서는 저녁이든 아침이든 주말이든 전혀 손도 안 대게 되던 오늘 저녁 8시.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그런가 논문 읽기도, 정리하기도 왠지 더 잘 되고, 배만 안고프면 집에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싶은 시간.  일이 어떠냐고 물어본 친구에게 답을 하려다, 오늘 낮에도 프랑스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본 친구에게 보낸 장문의 답이 생각나서, 내일 오전 교수님 미팅도 취소됐겠다, 오늘이 날인가 보다, 그걸 정리해서 뭐든 써야겠다 싶어 졌어요. 연구실 노트북은 한글 입력이  안되니까, 하고 언젠가 집에서 해야지 싶었었는데 마음먹으니 또 금방 바꿀 수 있네요.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요리 모임이나 각종 모임을 만들 때는 정해진 게 없어도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일(?)을  만들어서, 일이라는 생각도 없이, 했었는데... 저에게 있어 연구랑 공부, 그리고 글을 쓰거나 영상을 편집하는 일은 시작하고  몰입하면 주제에 따라 아주 재미있게 할 수 있지만 재밌어지는데 넘어야 할 임계점이 조금 높은 가봐요. 모임은 하겠다고 공지 해  놓으면 한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신청한 다른 사람들이 연루되어서 내가 벌인 일은 책임을 져야 되게 되니까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일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일하는 방법과 공간이 더 효과적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주제는, 기후변화 관련 주제로, 일단 목적은 매우 매우 맘에 들고, 방법론은 아주 기초적인 것만 알아서 이 분야에 대해 새로  알아보는 것도 재밌고, 연구의 결과도 ‘유용’하고 실질적으로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논문 찾고 읽고 정리하고 하는 건  재밌어요. 연구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써볼게요! 일단은 오늘은 일상적 프로세스(?)에 대해서만 소개해보려고요.


월-금 출근을 하면, 누가 무슨 일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관련 분야의 논문을 모으고 읽고 정리하고  궁극적으로는 논문을 쓰는 게 '일'인데, 아주 초기인 지금은 어떤 논문을 모으고 어떤 것부터 읽고 무엇을 정리해야 할지가 좀 막막하더라고요. 큰 방향은 알겠는데 뭐부터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잘 모르겠는? 읽을 게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읽을 건 너무 많고, 관련 있어 보이고 궁금한 논문은 모으면 한도 끝도 없이 모을 수 있거든요. 근데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리잖아요. 적게는 10페이지부터  길게는 500페이지.. 물론 처음엔 다 안 읽는 게 아니라 요약만 읽고 읽지 말지 정한다지만 그래도 개념을 잡으려면 뭔가 기본 틀이  되는 논문을 잡고 읽어야 하는데.. 중요해 보이는 자료 중에 십여 페이지의 논문 말고 수십수백 페이지 되는 보고서들도  많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논문과 보고서를 다운로드하여서 쌓아두고, 일단 읽기보다 뭘 먼저 읽는 게 좋을까, 우선순위를  고민하다가 시간이 슉슉 가게 됩니다.


다행히도  저의 헤맴이 심화될 때쯤, 둘째 주에 한번, 지난주에 한번, 교수님(편의상 L이라고 부르겠음)이 우선순위로 할 작은 일들을  제안해 주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순간 마법같이 눈앞이 맑아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어요. 첫 번째 제안은 L이 슬랙에 대충  링크만 모아둔 논문들을 다운로드하여 훑어보고 카테고리 분류해서 정리하기, 지난주 제안은 누구 졸업논문 읽고 요약하기. 단순하기도 하고  이미 제가 생각해둔 할 일 목록에 있는 일들이기도 했거든요. 근데 그 목록에서 대체 뭐부터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이거 읽다 저거  읽다 방황하고 있었는데 일단 이거 요약해서 다음 미팅 때 얘기해볼까 하니 아 그것부터 하면 되는구나! 하는 명료함에 마음이  가벼워지고 일도 쉬워지는.. 12년간 시키는 대로 공부해 온 주입식 교육에 최적화된 인간이라 그런가요 (근데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12년이 넘었는데..). 어쨌든 두 번 겪고 나니, 아 그냥 뭘 할지(주로 뭘 읽을지) 작은 단계들로 다 주욱 적어보고, 뭐가  우선순위인지 고민하며 깨작깨작 할 시간에 그중에 아무거나 하나 잡고 하면 되는구나 싶어요. 그래도 나름 기준을 갖고 검색해서  모아둔 거니까 감으로라도 찍어서 아무거나 하나 정리하며 읽다 보면 읽지 말아야 할 것들도 나올 수 있고, 괜찮은 건 계속 읽고, 그다음에 또 뭘 읽는 게 좋을지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감도 잡히겠구나. 지금은 새로운 분야에서 헤매면서 뭐가 효과적인지 찾겠다고 고민하다가 막혀 버리는 상황인 것 같아서요.  


뉴스레터도, 일상 이야기 중에 뭘 쓰지, 뚤루즈 집 구하기? 장보기? 마트와 시장의 비교? 생각보다 비싼 물가? 중고 자전거 구입 및 안장 교체기? 독일과 다른 점? 박사과정 구하기? 연구 주제? 학교 소개? 각종 행정절차의 진절머리남? 한국어로도 존재하지 않는  출생증명서를 불어로 만들어 내는 방법? 동네 소개? 도시락 소개? 독일 다녀온 이야기? 영국에서 지속가능성 & 퍼실리테이션 워크숍 들은 얘기? 모임 만들기? 친구 만들기? 대체 이 중에 뭘 먼저 써야 될까 하는 게 큰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걸  굳이 뉴스레터로? 그냥 하던 대로 블로그에? 아님 홈페이지를 새로 파? 이런 고민을 하느라 두 달을 보내고 한 자도 못 썼는데..  오늘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써 봤습니다.


그럼 다음 소식은.. 월 2회를 목표로 돌아올게요! 궁금한 주제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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