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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모나 Nov 11. 2024

어린싹을 짓밟을 수 있는 건 신이 아닌 어른이었다.

나약함

체벌.

그것을 받기엔 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어린싹과 같았다.

한없이 작디작은 어린싹을 짓밟을 수 있는 건 신이 아닌 어른이었다.


풍족한 햇빛과 그늘 아래 내가 제대로 자랐었다면 어땠을까.

한풀 꺾여도 금방 고개를 쳐드는 강하고 튼튼한 줄기가 있었더라면.

눈에 띌 새라, 나 자신을 흙 속에 파묻지도 않고 지나가는 발소리에 이토록 벌벌 떨지도 않았을 텐데.


눈앞이 선명히 빨갛던 날. 그 이후로 살기 위해 순종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그들보다 커질 날을 고대하며 그렇게 묵묵히 자라났다.



여덟 살,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수업이었다. 가위와 풀이 필요했다. 준비물을 챙기지 않은 아이들은 교실에 비치된 가위와 풀을 사용했다. 내 짝꿍도 그중 한 명이었다. 짝꿍이 교실에 비치되어 있던 풀 하나를 자리에 가져왔다.


나는 짝꿍이 가져온 교실 풀을 사용했다.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선생님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이 풀을 제자리에 예쁘게 가져다 두지 않았으며 더럽게 사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생님은 분노에 가득차서 개인용 풀이 아닌 교실에 비치된 풀을 사용한 아이들을 색출해 내기 시작했다.


교실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부터 한 명, 한 명 어떤 풀을 썼냐고 매섭게 물었다. 제 것의 풀을 썼다 말하면 가져온 풀을 확인했고, 친구에게 빌려서 썼다 말하면 빌려줬다는 애한테 진짜로 이 애한테 풀을 빌려주었는지 물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어떤 풀을 썼는지 차례대로 고해졌고, 교실 풀을 쓰지 않았다는 거짓말이 통할 수가 없는 완벽한 심문이었다.


교실 풀을 쓴 아이들이 칠판 앞에 하나 둘 세워졌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나는 극한의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곧이어 어김없이 나에게도 어떤 풀을 썼냐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내 옆에 버젓이 앉아있는 짝꿍은 건너뛴 채였다. 험악한 얼굴과 말은 오로지 나를 향했다. 강하게 짓누르는 극심한 공포에 짝꿍의 풀을 썼다고 했다. 너무 무서워서 진실을 말할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없어서 나온 말이었다.


짝꿍의 풀은 교실 풀이었다.


선생님은 내 짝꿍을 한 번 쳐다보고는 노발대발하며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내가 아주 나쁜 애라고 했다. 아주 나쁜 거짓말을 한 죄로 난 남들보다 두 배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내 대답에 대해서 내려진 심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살얼음판 위인 것처럼 벌벌 떨었다. 어깨를 한껏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채 내딛는 한 발 한 발을 쳐다보며 책상과 책상 사이 통로를 지나갔다. 맨 뒷자리에서 나아가는 칠판 앞은 너무나 멀었다.


짝꿍은 교실에 있는 여느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짝꿍은 여덟 살 보다 어린아이 같았다. 어쩌면 나 또한.선생님에게 나는 또래와 같지 않아 보살펴야하는 가여운 아이를 이용한 영악한 애였다. 두려움에 진실도 거짓도 아닌 사실을 읊조렸던 애가 아니었다.

그저 어린 게 약아빠진 애.


빠르게 반 아이들 모두의 심문이 끝이 났다. 풀을 예쁘게 가져다 두지 않은 죄로 아이들은 기다란 나무 매로 손바닥을 맞았다. 나는 남들보다 두 배를 맞아야 한다며 맨 마지막 순서를 받았다.


아이들은 아주 작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본인의 죄를 사하고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죄가 중하여 죗값을 치르지 못한 한 아이만이, 나만이 남겨졌다. 그날 모두에게 내 죄가 공표되었다.


자극적인 구경거리에 매료된 천사들이 자리한 숨소리조차 없는 적막한 잔치였다. 올망졸망 순수해서 악한 수십 개의 눈들이 그 죄인만을 바라보았다. 함께 죄를 지은 어느 천사들보다 여러 번 힘껏 내리쳐지며 거룩한 잔치는 막을 내렸다.


빨간줄이 그어졌다.

손바닥에서 부어오르는 만큼 그렇게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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