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展’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 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감상할 만큼 큰 화제가 됐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 못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 잠깐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 다양한 미술사조를 대표하는 고흐, 르누아르, 모네 등의 작품 131점을 한데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명화들 가운데 전시회의 포스터에 등장한 그림은 뭐였을까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기'였습니다. 과거 국내 크래커 광고에도 나올 만큼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림에 관심 없으신 분들도 한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이 작품 속 여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그들의 자세를 잠깐만 흉내 내더라도 허리가 꽤 아플 것 같지 않으신가요.
당시 지주들은 농부들을 동원해 대규모 경작을 한 이후 남은 이삭들을 주워가게 했습니다. 추수가 끝난 후 남은 이삭을 줍는 일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작은 이삭 하나를 찾아서 줍기 위해선 그림에서처럼 허리를 최대한 굽혀야 하고,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봤자 양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일은 당시 그 지역의 최하층민들이 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주워가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는데요. 여인들 뒤로 멀찌기 보이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시나요. 지주가 그들을 감시하며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땅은 화폭에서 늘 풍요를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기존에 화가들이 부여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습니다. 당시 풍요는 모두의 것이 아닌 지주만의 것이었죠. 소작농들은 풍요의 상징 땅 위에 있지만 허리 한번 펴는 것조차 쉽지 않고, 아무리 일을 해도 끝없이 빈곤했습니다.
이 실상은 해당 시대와 공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화폭에 담을 수 없었죠. 신성하고 위대한 신화, 역사 속 이야기만이 그림의 소재가 됐으니까요. 일상은 감히 화폭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평범한 서민들과 빈곤층의 이야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아름답지 않다' '보기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화폭의 방향성은 ‘리얼리즘(사실주의)’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습니다. 미술사 최초로 민중들의 삶으로 들어가 이삭 하나에 담긴 그들의 설움, 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기 시작합니다.
이 전시회에서 수많은 작품 중 이삭줍기를 대표작으로 내건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아직 세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평범한 당신이 내뱉지 못하고 삼켰을 눈물, 그래도 다시 한번 웃고 품었을 희망을 비추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내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그려 보겠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이 말 한마디는 리얼리즘을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쿠르베는 단지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닌 눈앞에 보이는 소재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를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리얼’하게 그리면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디테일하게 그린다고 해서 리얼리즘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현실을 구체적이고 깊게,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표현해내는 게 리얼리즘의 핵심입니다.
리얼리즘이 현실을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다른 리얼리즘 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말을 빌려볼까요.
예술가는 그 시대에 존재해야 한다.
동시대성. 예술가들에게 숙명이자 염원입니다. 미술에선 특히 더욱 그런데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 혹은 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대상들을 거친 붓질로 담아내는 것은 화가들에게 당위적인 숙제입니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러나 화가들은 치열한 고민을 통해 동시대성을 표현할 리얼리즘을 탄생시켰습니다.
무조건 현실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만이 동시대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아닙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 박자 어긋난 템포로 그 시간을 사는 이들의 숨은 감정을 포착하고 이끌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감정 깊숙이 빠져들게 해야 합니다.
도미에 역시 그렇게 시대에 존재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삼등열차’를 살펴볼까요.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경기는 급격히 침체되면서 서민들은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정치는 이들의 삶에 무관심했고 서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도미에는 이 작품에서 가난에 처절하게 허덕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열차 칸에서 서민들의 표정을 바라봤습니다. 바구니 위에 두 손을 얹고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노파,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여인의 고단한 시선이 느껴졌죠. 그는 그렇게 삼등열차 칸에서 나의 식량, 나의 가족 이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담담한 색채로 시대를 고스란히 전했습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성'에 대해 이렇게 정의 내립니다.
동시대성은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속해 있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다.
자신이 속한 시대나 세기의 찬란한 빛에 눈멀지 않고 모호성을 인지해야 한다.
리얼리즘 화가들은 아감벤의 말처럼 현실을 담담하게, 그러나 깊게 인지하며 동시대성을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회에선 '2. 그는 왜 주먹을 쥐었나'란 부제로 해당 글을 이어갑니다. 많은 기대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