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오케스트라엔 좋은 연주자는 없어도 좋은 지휘자는 있다
클래식 업계에 오랫동안 공식처럼 내려오는 말입니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면 흔히 현란한 연주를 하고 있는 연주자들에게 마음이 빼앗기죠. 모두가 딱딱 맞춰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며 ‘연주가 정말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멋진 연주가 단순히 연주자 개인만의 역량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 전원이 엄청난 재능을 가진 훌륭한 연주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두 파트 혹은 한두명의 연주자만이 남들보다 뛰어난 역량을 가진 오케스트라도 있을 수 있죠. 정말 드문 경우지만 저 말의 의미를 따져보자면 좋은 연주자가 한명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훌륭한 연주를 이끌어 내는 것,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기적같은 일처럼 보여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은 지휘자가 있다면 말이죠.
그만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휘자들의 손동작을 보면 그냥 박자에 맞춰 손을 휘젓고 몸을 들썩이는 정도로만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리더이자 구심점입니다. 그는 유일하게 악기를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케스트라 그 자체가 지휘자의 악기인 셈이죠. 지휘자의 지휘 실력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최고가 될 수도, 최악이 될수도 있습니다.
‘마에스트로 (maestro)’ 란 말 들어보셨나요. 지휘자 중에서도 거장들을 부르는 단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원래 지휘자는 영어로 ‘컨덕터(conductor)’라고 불리는데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대가에게 마에스트로란 호칭을 쓰는거죠.
마에스트로의 길은 험난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나아가 관객들의 인정을 모두 받아야 하기 때문이죠. 이를 위해선 각 단원들의 개별 소리를 하나로 끌어모아 최상의 소리를 내는 능력이 중요한데요. 여기엔 음악적 역량 못지 않은 ‘리더십’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마치 기업의 CEO처럼 지휘자의 리더십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미국 뉴욕필하모닉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리허설 전부터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린 리더십으로 유명합니다. 연주 전부터 말을 걸고 안부를 물어봤다고 합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면 연주에도 그 마음이 담길 테니까요. 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음악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는데요. 이상적인 경영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그래서인지 번스타인은 단원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당시 그와 팽팽한 라이벌 관계였던 또 한명의 마에스트로가 있습니다. 베를린필하모닉을 이끌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인데요. 카라얀의 이름은 클래식을 잘 모르는 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의 지휘는 정말 독특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카라얀은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단원들을 쳐다보지 않고 눈을 막고 지휘를 합니다. 음악에 혼자 심취한 듯 보이기도 하는데, 관객들은 어떤 것에도 방해받기 싫은 듯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의 손에 열광했죠.
그가 단원들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텐데요.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는 퍼포먼스인 동시에 카라얀만의 리더십 표출이기도 했습니다. 단원들이 자신만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과의 호흡을 통해 자율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나가길 원했던 거죠.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자신도 단원들과 교감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내가 오케스트라에 입힐 수 있는 가장 큰 손해는
단원들에게 명확한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지향하는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55gtz0xrc0
또 다른 리더십을 가진 마에스트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도 있습니다. 불같은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습 중에 ‘노(no)’란 소리를 너무 많이 질러서 사람들은 ‘토스카노노’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네요. 번스타인, 카라얀, 토스카니니와 달리 지금도 우리의 곁에 있는 리카르도 무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그는 과거 라스칼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1986년부터 2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던 무티는 단원들과의 불화로 2005년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당시 라스칼라 극장장 해임을 놓고 단원들과 갈등을 빚다가 700명에 가까운 단원들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사퇴 요구를 받고 떠나게 됐죠. 그는 평소 ‘포디엄(지휘대) 위의 독재자’로 불릴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는데요. 연주자들에 대한 배려보다 음악 자체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이 더 강한 인물이었기에 불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 무티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만, 그의 리더십에도 장단점이 있죠. 무티는 베르디의 음악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 내는 지휘자로 손꼽히며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마에스트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 무대도 자주 찾는 그가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들으면 그만의 리더십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이와 친구가 되고 사랑받는 지휘자는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100명쯤 되는 오케스트라는 일종의 민주사회라
모든 구성원이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끔은 권위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다음 회에선 '2.섬세함부터 창의성, 끈기까지…다재다능의 마에스트로'란 부제로 해당 글을 이어갑니다. 많은 기대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