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보르미 Jun 10. 2021

니도 내 딸이지만 가도 내 딸이다

여섯 번째 딸과 첫 번째 아내/7분의 1 엄마

"니도 내 딸이지만 가도 내 딸이다"

...


그래 맞는 말이다...

엄마에겐 여섯 딸이 있었으니...


작년 7월부터 새 일을 시작했다.

나름 큰아이도 초등학교 생활을 잘 적응했고, 둘째는 돌 지나면서 어린이집 적응을 시작해서, 이제 18개월을 넘어서는 단계라 다시 내 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워킹맘의 생활은 확실히 아이가 하나 일 때와 둘 일 때는 많이 달랐다.

특히 아직 두 돌도 안된 둘째는 툭하면 감기를 달고 살았고, 더군다나 소고기, 우유, 마늘에 알레르기가 있어 많은 음식을 직접 해서 간식으로 보내야 했다.

일등으로 어린이집 등원을 하고 꼴찌로 하원을 하는 생활이 계속되자 둘째는 소소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머님~ 둘째가 친구를 자꾸 꼬집어요..."

"어머님~ 둘째가 친구를 밀어서 친구가 다쳤어요..."

"어머님~ 둘째가 다른 친구들 하원 하는 모습을 보고 저에게 안겨 울었어요... 혹시 하원 도우미를 쓰는 건 어떠세요?"

어린이집 선생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주셨고,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방법이 없을까 고민은 했지만, 나도 내 업무에 정신이 없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사무실에선 꼴찌 출근에 일등 퇴근을 했고 어떻게든 퇴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점심시간도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하원 도우미를 쓰라는 전화를 받았을 땐 둘째가 일찍 하원 하면 선생님도 일찍 퇴근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님 있다 뵐 수 있는 거죠?"

"네네 그럼요. 오늘 좀 일찍 퇴근하기로 했어요, 늦지 않게 갈게요~"

둘째의 어린이집 상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상담을 갔는데도 어린이집에 남아 있는 아이는 둘째뿐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 상담을 시작했다.

발달상태나 놀이 모습 등 이런저런 설명을 하시더니 일주일치 날짜와 바를 정자 표시가 된 종이를 내밀었다.

"어머님. 이건 둘째가 친구를 꼬집을 때마다 저희가 표시해 둔 거예요.

월요일은 이렇게 많았고 화요일은..."

종이를 보는 순간부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씹어 삼키며..

"선생님...잘 못 할 때마다... 체크를 하셨다고요..."

어렵게 꺼낸 말의 끝을 맺기가 무섭게 목놓아 엉엉 울어버렸다.

서러웠다. 내 아이가 받았을 눈초리와 아픔이.

서러웠다.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내 상황이.

"선생님. 어떻게 이런 걸 체크하고 계실 수 있어요?

설령 체크해서 확인이 필요하셨다면 본인만 보고 저한텐 보여주진 마시지 이게 뭐예요?

우리 아이 미운 모습 찾고 다니신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미운 모습 얼마나 많이 보였나 체크하고 계시면 계속 미운 모습만 찾게 되고 미운 아이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더는 이런 곳에 아이를 맡길 수가 없어요.

저 오늘부로 퇴소할게요"

선생님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계셨지만 이미 이성을 잃고 눈물범벅이 된 나는 상담하는 사이 잠든 아이를 들쳐업고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든 말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목놓아 울며 집으로 향했다.

땅이 꽁꽁 얼은 2월의 깜깜한 밤.

내 마음도 꽁꽁 얼었고 흘린 눈물도 꽁꽁 얼어붙었다.


퇴소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당장 내일부터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때마침 담날부터 첫째의 돌봄 교실이 방학이었고 1시간 거리의 언니 집에 맡기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염치없지만 하루만 둘 다 보내야 할 것 같다고 언니에게 연락을 했고. 언니는 기꺼이 허락해줬다.

아침 일찍 언니 집으로 들렸다 출근해야 했기에 미리 짐을 싸 두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이 잠은 오지 않았다.

"언니 진짜 고맙고 미안"

"첫째야 둘째 잘 봐주고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 엄마 퇴근하고 올게~"

정신없이 출근을 했다.

어린이집도 다시 알아봐야 하고 업무도 진행해야 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였다.



"어 엄마!

무슨 일이야? 나 좀 바쁜데..."

"니 느그언니한테 또 애 맡겼나?"

"어? 어..."


맞다.

또 맡겼다.

양쪽 부모님 모두 지방에 계셨고. 친정엄마는 다섯째 언니 아이를 봐주고 있는 상황.

우리가 손을 내밀 곳은 그나마 가까운 거리의 전업주부 언니였다...

여름과 겨울 어린이집 방학은 길었고 남편과 내가 번갈아 쉬고도 모자라는 날은 첫째를 언니 집으로 보냈다.

가끔 언니는 남편과 내가 데이트다운 데이트 좀 하고 오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고, 덕분에 육아에서 벗어나 영화 한 편을 보기도, 차를 마시기도 했다.

한없이 고마웠고 그런 언니에게 친정엄마를 느끼기도 했다.

이번엔 첨으로 둘을 같이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고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던 내게 걸려온 엄마의 전화였다.


"니 자꾸 언니한테 애를 맡기면 우짜노."

이미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 내가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

엄마가 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사무실이라는 것도 잊은 채 울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엄마는

"느그 언니 힘든데 니가 자꾸 눈치 없이 맡기는 거 아닌가 싶어 그러재.

니도 내 딸이지만 가도 내 딸이다"

어떻게 엄마는... 하루하루 살아낸다기보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가혹할까...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곤 화장실로 갔다.

세상에서 버려진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나 혼자인 느낌이었다.


나는 여섯째 딸이다.

엄마에겐 일곱 명의 자식이 있다.

그런 엄마였기에 많은 것을 원한 건 아니다...

그저 따뜻한, 아니 그저 배려의 말만이라도...

욕심이었을까...


퇴근길에 언니 집에 들렀다.

언니는 엄마의 소식을 듣고는 자기는 괜찮다며 그런 생각 말라고 했지만 차마 더 있을 수 없어 애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우린 좋은 아이 돌봄 선생님을 만나 몇 년을 보냈다.

기댈 때 없이 둘이서 힘든 과정을 헤쳐 나온 우리 부부는 더욱더 끈끈함으로 하나가 되었고 서로를 더 의지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첫째와 둘째는 이제 혼자서도 집에 잘 있을 만큼 자랐다.

첫째에게 둘째의 보살핌을 부탁할 수도 있고, 둘째는 첫째를 잘 따르고 많이 좋아한다.

나는 업무도 손에 익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정은 많이 안정적 이어졌고,

여유가 찾아왔다.

이제야 그때 당황하며 눈물 흘리던 어린이집 선생님도 헤아릴 여유가 생기고, 언니 아이를 봐주느라 아이 돌봄의 힘듦을 알아주라는 엄마도 헤아릴 여유가 생겼다.

그럼에도 그날의 아픔이 기억되는 것은 내게 새겨진 여섯 번째라는 도장 때문이 아닐까...


비록 엄마에겐 여섯 번째였지만 남편에겐 첫 번째 아내고 아이들에게도 첫 번째 엄마이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었던 여섯 번째의 도장은,

내가 이룬 가정 속에서만큼은 첫 번째로 새겨지고 있다.



ps 내 아이로인해 상처받았을 친구들과 어린이집 선생님께 머리숙여 깊이 사과합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때는 몰랐던 못난 엄마를 용서해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