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점 시험지
가방에서 뭔가를 쭈뼛쭈뼛 꺼낸다.
그리고 슬쩍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80점짜리 수학 시험지다.
"뭐야?
80점이라고?
대박!!! 와!!! 진짜 잘했네!!
와!!! 와!!! 와!!!
열심히 하더니 엄청 잘했구나!!!"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더 흥분해서,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고, 내 소리를 듣고는 남편도 한껏 거들었다.
칭찬에 인색한 누나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오~ 잘했네"
80점 시험지에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이유는...
그간의 노력과 아이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실 너무너무 어려웠다.
매일 공부를 함께 하기는 했지만, 늘 내 마음만 조급했고, 한 번만 더 체크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이는 '이제 그만할래요'를 외쳤다.
했던 내용을 복습하면 다시 처음 공부하는 것처럼 많이 잊어버렸다.
학교 진도를 맞췄고, 학원에서도 학교 진도에 맞춰서 교과서 위주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요청을 드렸다.
학교, 학원, 집.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하면서도 서술형 문제는 거의 빼고 하는 수준으로 기본적인 것에만 집중했다.
그런 아이가 맞아온 80점이란 점수에 우리 가족은 호들갑스러운 칭찬으로 아이를 격려해 주었다.
알고 보면 그 시험문제엔 선생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4학년, 5학년, 6학년 담임선생님들.
4학년 중반을 넘어가며 우리는 아이의 문제를 조금씩 알아갔고, 4학년 말쯤엔 거의 멘붕 상태였다.
힘들어 어디라도 기대고 싶었을 그때 도움을 주신 4학년 선생님.
어떤 상황에선 나보다 내 아이를 더 믿어주셨고, 도움이 되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때 처음으로 선생님께서 알려주셔서 알게 된 단어가 "느린 학습자"였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청 제도를 알려주셨고, 학기말 바쁜 상황에서도 시간을 따로 내서 기꺼이 상담도 해주셨다.
5학년이 되어서도, 6학년이 되어서도 선생님은 아이에게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주셨고, 다른 문제로 방문할 일이 생겨 학교를 찾아갔을 때, 일부러 기다리고 나를 만나주신 적도 있었다.
애써 주시고, 관심 가져주심에 그저 감사하고 감사했다.
5학년 선생님은 초등학교에 흔치 않은 남자분이셨다.
이런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정적이셨고, 아이들 편에 서 계신 정말 선생님이란 이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학기 초반 아이의 어려움을 알고는 전화도 자주 해 주셨고,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늘 고민을 함께해 주셨고, 각 학년과 반에서 경쟁이 치열했던 학습 지원 튜터 선생님 배치도 지원받게 도와주셨다.
튜터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반 전체를 도와주시는 선생님이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셨지만, 실질적 지원 대상자는 우리 아이였다.
자주 통화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느낀 건 정말 아이 편에서 생각해 주시는 분이셨고, 나에게도 잘하고 있다고 어머님 같은 분 없다고 늘 칭찬하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셨다.
열정이 가득했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공부도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매달 한 번씩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데, 아이는 매번 많이 틀려서 왔다.
한 달에 한 번 치는 받아쓰기 시험이었고, 미리 문장까지 다 준 상황이라 우리에게 거의 한 달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주워졌었다.
매일 쓰고 쓰고, 또 썼는데 아이는 띄어쓰기 실수, 마침표, 따옴표 등 문장부호를 안 쓰는 실수, 때론 겹받침 글자를 헷갈려하는 실수를 늘 했다.
오죽했으면 마지막 시험에서 나는 선생님께 장문의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염치없는 부탁 말씀이라 몇 날을 고민하다가 그래도 말씀을 드리는 것이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선생님께 감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사실 지난번 받아쓰기 시험도 oo이 나름은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띄어쓰기를 비롯해서 많이 틀렸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은 지난번 받아쓰기 시험이 끝나고 나서부터 5단원 연습을 시작했어요.
중간에 받아쓰기 시험 소식이 없어서 이제 안치나 보다 하고 좀 쉬기도 했지만, 받아쓰기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다시 연습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oo 이가 '해도 또 10점 받을 것 같아요' 하며 걱정하고 풀이 죽어 있어서...
oo 이는 꼭 연습이 필요한 사람이고, 연습을 많이 하면 잘할 수 있다고 제가 격려를 계속해 주고 있어요.
선생님, 상시 평가 등 공정을 요하는 평가가 아니라면 이번 받아쓰기 시험 치면서 oo이 쓰는 것 한 번만 확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
oo 이에게 연습하면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oo 이가 시험 치면서 또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 염려스럽기도 해서요...
선생님께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수없이 하면서...
그간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고, 선생님 생각을 들어왔던 저로서... 감히 선생님은 이해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서...
이런 부탁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선생님 혹시 제가 실수하는 것이라면 그냥 모르는 척해 주셔도 되세요.
공정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이시기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탁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요^^
오늘 저녁도 다시 열심히 연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셨고,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이렇게 편지로 마음을 전한 것에 오히려 고마워하셨다.
마지막 받아쓰기 시험에서 아이는 80점을 받았고, 우린 그날도 노력한 아이에게 차고 넘치는 칭찬을 해주었다.
너무 좋았던 5학년 선생님을 만나서 어떤 선생님을 만나도 6학년 선생님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 6학년이 되고는 등교하는 아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5학년 때는 자주 학교를 늦게 가서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고, 상담 혹은 통화할 때 선생님께서는 좀 더 일찍 등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었다.
8시에 집을 나서는 나로서는 분명히 일어나서 씻고, 밥까지 먹고, 옷까지 입은 모습을 보고 출근했는데, 9시 15분이 넘어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나 놀라서 여기저기 물어물어 경비 아저씨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집으로 가봐 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드리기도 했었다....
"아이고, 아직 자고 있네요"라는 경비 아저씨의 말씀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길 한두 차례 겪고는 익숙해졌다.
5학년과 다르게 6학년이 되고는 지각의 문제는 싹 사라졌다.
지금 선생님은 9시 10분까지 등교만 하면 된다 주의다.
일찍 와서 수학한 문제 혹은 책 한 장 읽기를 바라셨던 5학년 때 선생님과는 완전히 다르다.
선생님은 이번 수학시험 문제도 정말 기본적인 문제만 내셨다. 그래서 아이가 80점까지 맞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추후에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본적인 것만 확인하고 기본에 충실하면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주는 것에 초점을 둔다고 하셨다. 그래서 70점부터는 재시험인데 재시험을 보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고 하셨다^^
아이가 학교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거 아니냐고 선생님께 여쭤보니 선생님은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며 10분까지 교실에 오기만 하면 된다고, 반 아이들 모두 너무 잘하고 있다며 걱정 마시라고 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두 분 다 남자 선생님.
너무나 다른 두 선생님이지만 5학년 선생님은 그 선생님대로, 6학년 선생님은 또 그 선생님대로 너무나 감사하고 좋은 분들이다.
선생님의 관심과 도움 없이는 느린 학습자 아이들은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더욱 느려지는 길을 걷게 될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공동체 생활이란 것이 평균의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과 도움은 선생님의 또 다른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임을 잘 안다.
그러기에 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앞으로 우린 또다시 이 80점을 만나기 위해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하고, 얼마만큼 기다려야 할까...
점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의 아이에겐 노력으로 따라오는 성과가 그래도 필요해 보인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는데, 늘 반타작만 한다면 과연 공부가 하고 싶을까...
그래도 지금 6학년 선생님 지도 아래서는 멀지 않은 시간에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꼭 한번 글로 남겨두고 싶었던 선생님들 이야기.
우리에게 지금의 선생님들을 만나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행운이 계속 함께하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욕심이라 할지라도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