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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의취향과 윤글 Jun 20. 2020

오비이락 (烏飛梨落)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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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이락(烏飛梨落)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까마득히 높은 전봇대의 고압전선에는 까마귀가 대여섯 마리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보기 힘든 풍경은 아니었지만 모처럼 한가한 때를 만끽하기에 이토록 좋은 구경은 없어서, 나는 본격적으로 창밖의 까마귀 떼를 하릴없이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까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한동안 앉아만 있었는데 무척 우아해 보였다. 아무 움직임 없이 얇은 전선 위에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굉장했다. 꼭 이전에 가서 봤던 민속촌의 외줄 타기 공연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재밌었다. 신기하고 완벽한,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연이었다. 내 입장에선 그랬다.


  이 순간이 완전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제목은 평화, 부제는 까마귀 떼와 나. 세상과의 경계가 생긴 것 같았다. 숨소리 이외의 모든 소리는 뭉뚱그려졌고 다만, 이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만 명확했다. 나와 내 주변에 한동안 시끄럽게 벌어진 모든 일이 다 허상 같고, 평화로운 지금이 진짜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역시 쉬어야 했던 거구나 싶었다. 1분 1초,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때였다.


  침묵 속 균형 잡기만 하던 까마귀 떼가 한순간 날아가고, 온종일 조용하던 휴대폰이 갑작스러운 연락에 스스로 놀란 듯 날카롭게 진동했다. 한동안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줬던 경계는 깨졌고, 까마귀들은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았다. 목적이 뭐든 상대에게 화가 날 것 같아서. 결국 휴대폰을 뒤집어 무음 모드로 바꿔 외면하기를 택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바깥을 바라봤지만, 까마귀 떼는 이미 사라졌고 그 완전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반나절, 내게 주어진 평화는 딱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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