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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누아르 영화 "화란"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by 이원희

잘생긴 배우 송중기가 등장하는 영화 화란.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세계는 아무리 빛나는 사람도 희망을 찾기 어려운, 어둡고 답답한 지옥이었다.


꽃의 나라 네덜란드로 떠나고 싶은 주인공 연규.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의붓동생을 지키려다 폭행을 하게 되고, 깡패조직의 중간보스 '치건'과 얽히며 도움을 받는다. 연규는 돈이 필요해 조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도 역시나 지옥다.


영화 제목 화란은 네덜란드를 뜻하기도 하지만,

'재앙'과 '난리'를 의미하는 이중적인 단어다. 그 이름처럼 화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빛이 없는 환경에서라도 짧은 시간 한철 피어나는 꽃처럼 딱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 스쳐가지만, 국엔 은 지옥으로 돌아오는 현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품는 것조차 허왕된 꿈이 아니었을까?


"해 야돼 이거"

"집으로 돌아가면 그게 니 미래야. 꿈같은 건 꾸지 말고"

치건의 말은 잔혹한 현실을 대변한다. 연규는 지옥에서 또 다른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 안에 놓여있다. 희망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친다. 불안하지만 한줄기 빛이라도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의붓아들을 학대하는 새아버지. 맞는 아들을 무력하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엄마. 그리고 하염없이 맞을 수밖에 없는 연규. 치건 역시 죽을뻔한 사건으로 세상은 지옥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세상의 냉혹함 속에서 깊은 분노와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누구 하나 독하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지옥이다. 도와주는 이도 없고, 잘못이라 알려주는 이도 없다.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지 못해 마저사는 것 같은 웃음도 없는 어둡고 침침하기만 하다. 그들은 불쾌한 삶을 그냥 살아간다.


치건은 연규를 보며 본인을 보는 것 같은 연민을 느꼈다. 300만 원도 빌려주고, 손톱도 대신 뽑으며 살펴주는 것을 보면 연규가 본인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규에게 희망을 본 것일까.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치건이 연규를 위해 만든 것 같은 나무상자에는 낚싯바늘 2개가 있었다. 그것은 죽을 뻔한 치건을 건져 올린 것이다. 날 죽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연규도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 화란국으로 떠나라는 의미 아닐까. 작고 약한 낚싯대로 건져 올린 새로운 삶은 치건에게는 지옥이었다. 올바른 어른이 한 명이라도 치건에게 있었다면 그의 삶은 그토록 분노와 어둠 속에서만 있지 않았을 것 같다.

큰 형님의 임무수행을 완수하지 못한 연규는 코너로 몰렸다, 치건은 모든 오토바이를 다 팔아 그를 도울준비를 했다. 실패한 연규가 손목을 스스로 자르고 떠나려는 것을 치건이 말리다 싸운다. 결국 치건은 연규의 손을 빌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어차피 돌아가도 니 미래는 지옥이니까 반복되는 지옥의 삶이 싫어서 스스로 악연을 끊어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걸까? 연규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도움을 주고 싶어서 죽음을 선택한 걸까? 래도 연규는 희망을 품고 있는 의붓동생 하얀 이 있다는 것이 치건과 달랐다 그녀는 맞고 있는 그를 조금은 덜 맞게 해 주었니까.


치건을 죽이고 연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새아버지의 손에 죽어있는 엄마를 본다.

분노 연규는 새아버지를 죽이려고 야구방망이를 들었지만 하지 않는다. 대신 죽은 엄마의 손을 잡다. 따뜻한 손길이 얼마나 필요했을까. 악연 같은 지옥의 연결고리를 끊고자 했던 연규는 의붓동생 하얀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다.


나는 그들의 목적지에는 희망이 있기를 바랐다.

또 다는 지옥이 아니길, 마지막 남은 가족과 함께 화란국에서 웃기를 바랐다.


영화를 보는 내도록 어두웠고, 침울했다.

답답하고 묵직하고 불편했다.

밝은 기운은 전혀 없어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도 동트기 전이라 어두워서 그들이 과연 희망을 찾으러 간 것일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아진다는 의미가 또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규와 하얀이 함께한 마지막 여정은 희망을 품고 싶은 관객의 바람을 담아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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