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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Feb 06. 2024

방학의 의미

네게머문 마음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전화를 돌린다. 딸의 친구들이 소개했다는 A학원. 듣던 대로 딸과 같은 학교 친구들만으로 반이 2개나 개설되어 있다고 했다. 한 반은 이미 10명이 넘어서 새로 만든 다른 반에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수강해야 하는 요일과 시간대, 원비를 물어보고 열심히 메모한다. 전화가 끝나자 직장 동료가 추천해 준 B학원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누른다. 아직 방학 시간표가 완성되지 않아 다음 주가 되어야 시간표가 나온단다. 다음 주에 전화 달라는 말을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방학은 분명 ‘휴식’과 일맥상통하는데 방학을 맞이하는 우리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도대체 방학은 누구의 것인지 주인이 새삼 궁금했다.     


  중2인 딸은 방학이 시작되기 전 기말고사를 쳤다. 중간고사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겠다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나를 닮아 파워 J인 딸은 계획표를 짜고 성공할 때마다 하나하나 줄을 그었다. 누가 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열심히 해 주는 딸이 고마웠다. 새벽까지 딸 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마음속에 켠 목표에 대한 불도 시험 기간 내내 꺼질 줄 몰랐다.     


  기말고사를 맞아 전력질주를 한 딸은 결국 ‘번아웃’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됐다. 딸은 여름방학까지 남은 기간 내내 힘들어했다. 학교에 다닐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했고, 친구들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했다.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자신은 공부에 재능이 없는 듯하다고 했다. 자기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 수월하게 고득점을 받는 것 같다고도 했다. 중간고사와 비교해서 분명히 성적이 올랐는데도 스스로가 정한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자 실망이 깊었던 모양이다.      


  기말고사 결과로 슬퍼하다 보니 방학이 코앞에 와 있었다. 영어 학원도, 수학 학원도 방학 특강을 한단다. 영어 학원에서 보낸 메시지에는 방학을 맞아 문법 특강을 한다, 수학 학원에서는 방학을 맞아 주 3회였던 수업을 주 5회 하겠다 등 정치인들처럼 여러 가지 공약을 뿌리는 것 같았다. 특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 같아 모조리 신청했다.      


  마음에는 번아웃이 왔지만 머릿속으로는 고득점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하던 딸은 과학 학원까지 등록해 달라고 했다. 영어, 수학 학원에 다니는 것만 해도 힘들어하면서 과학 학원이 웬 말인가! 교과서 위주로 열심히 공부한 딸은 사교육의 도움 없이는 상위권의 점수를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을 개탄하며 오래오래 슬퍼했다. 깊은 슬픔 후 우리가 도착한 종착지는 사교육의 골목을 하나 더 늘리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교육의 길을 걸어야 했기에 방학이 시작되자 딸은 더 바빠졌다. 9시부터 3, 4시까지 학원 수업이 이어졌다. 점심을 제때 챙겨 먹일 수도 없었고, 학원이 끝났다고 해서 집으로 곧장 오지도 않았다. 학원이 마련한 스카(스터디카페)에서 수업이 끝나면 자율학습도 하고 왔다. 누가 남아서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유전적 성실함으로 매일매일을 채웠다.      


  이것저것 정리되어 가는 것 같던 주말 아침,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주말 수업이 아침 9시 시작인데 딸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간의 긴장이 풀린 것 같기도 했고 쉬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이 몸으로 나타난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깨워도 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날 계획되어 있던 2개의 학원을 모두 쉬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일어난 딸은 학원을 빠졌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오전에 계획되어 있던 영어 학원을 당분간 쉬기로 했다. 대신 오전에는 일찍 일어나고 운동을 하라는 특명을 주었다. 체력과 바른 생활 습관을 길러 앞으로의 장기 레이스에서 쓰러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설사 우리의 길이 공부가 아닐지라도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처음에 딸은 불안해했다. 모든 친구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보충까지 하며 학원을 다니는데 자기는 쉬려고 하니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고 단기 레이스가 아님을 계속 확인시켰다. 긴 인생에서 한 달 쉰다고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며 쉬라고 했다. 바쁜 가운데 전화기를 붙잡고 수소문하던 과학 학원도 결국은 방학이 끝나고 2학기부터 다니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무언가를 더하기보다는 빼나가야 하는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듯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딸은 평정심을 찾은 것 같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한 가득 빌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다정히 손을 잡고 빈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걸어갔다. 각자 빌리고 싶은 책을 대출한도만큼 빌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까페에 들렀다. 시원한 음료를 시켜놓고 우리가 고른 책을 읽었다. 햇살은 뜨거운데 실내는 쾌적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시원한 얼음음료로 더위를 물리치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는 방학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1등부터 꼴찌까지 모든 아이들이 학원을 다닌다. 다닐 것이다. 다니지 않으면 엄마고 아이고 불안해하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잘하는 아이들은 더 잘하려고 다니고 못하는 아이들은 보충하려고 열심히 학원에 다닌다. 학원가서 진짜 열심히 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아이들이 어느 정도 될지 궁금하다.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질까 불안해지고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게 될까봐 걱정되기도 할 것이다. 나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는 보통의, 평범한 엄마지만 가끔 상상한다. 방학의 참 의미를 살린 우리만의 방학에 대해. 방학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목록으로 작성한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계획한다. 그리고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는 듯 하고싶은 건 모조리 다 한다. 또는 정반대로 어떠한 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날의 컨디션과 마음에 따라 즉흥적으로 정해진다. 침대와 한 몸이 되기도 하고 마음이 동하면 어딘가로 떠날지도 모르겠다. 전자와 후자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공부에 관한 것은 일체 하지 않고 공부단식을 하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위주의 학습을 의미함)      


  딸은 결국 방학 동안 학원 1개만 다녔다. 쉰 것도 아니고 안 쉰 것도 아닌 절충형 방학이라고나 할까? 개학한 딸은 오늘도 학교가 끝나면 허겁지겁 학원으로 달려간다. 돌아와서는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학원 숙제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하나, 방학이다! 설사 쉬지 못하는 방학이라 할지라도 방학이라는 말 자체로도 이미 좋은가보다. 딸의 방학이 방학답기를 바란다면 거짓말일까? 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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