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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정 Feb 22. 2024

네 가지 행복

내게 머문 마음

  홀가분한 마음을 실은 차가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딸들의 취향에 맞춘 최신음악이 차 안의 여백을 메운다. 직장에서의 모든 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마음은 한결 가볍다.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미로처럼 복잡하던 머릿속이 이제야 고속도로처럼 정리되었다. 한 학년을 끝내고 다시 방학에 들어간 큰딸도, 졸업식만을 앞둔 둘째에게서도 여유가 느껴진다. 네 명이 다 같이 동행하여 떠나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휴식을 하러 여행을 간다지만 우리가 함께 이기에 이미 휴식은 시작된 듯하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이렇듯 짧은 휴지기라도 가질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더 높이, 더 멀리 비행해야 할 새 학기의 우리들을 응원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가 선택한 여행지는 ‘경주’였다. 거리상 가깝기도 했고 아이들이 어릴 때 자주 다녀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정말 자주 가곤 했는데 공부할 시기에 접어든 딸들은 학원 때문에 주말에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다녀오고 나서 마주해야 할 과제들이 여행의 즐거움을 앗아갔다. 여행은 사치 같았고 눈앞에 닥친 과제들은 매일 청소하는데도 쌓이는 먼지처럼 계속 쌓여갔다. 주말이면 집에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집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이 도래한 것이었다.      


  오랜만의 경주여행이었지만 우리는 늘 그렇듯 같은 루틴을 반복했다. 늘 같은 호텔에 예약을 잡고 같은 메뉴의 식사를 하고 같은 코스를 둘러본다. 먼저 호텔에 짐을 풀고 호텔에 딸린 온천으로 목욕을 하러 간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오가고, 차가운 바람에도 노천온천까지 즐기고 나서야 목욕은 끝이 난다. 몸속에 들어 있던 스트레스를 물에다 풀어놓고 나면 허기가 진다. 저녁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치킨이다. 늘 주문하던 곳에서 치킨을 주문하고 가끔은 컵라면까지 초대한다. 그날만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인스턴트 음식을 기꺼이 먹인다. 다음 날 아침은 늦잠을 잔 뒤, 호텔 조식 부페를 먹고 체크아웃을 한다. 새로운 것들이 주는 신선함과 설레임 대신 익숙함과 편안함을 선택한 것이다. 먼 훗날 경주를 떠올리면 우리가 함께 했던 또렷한 장면과 배경들이 무한으로 반복될 것만 같다.     


  호텔을 뒤로하고 우리는 황리단길로 간다. 같은 거리지만 매번 새로운 상점들이 태어나고 사라진다. 처음에는 작고 짧았던 길이 시간이 갈수록 크고 길어진다. 이제는 그 끝과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늘 가던 그림책 서점도 가고, 취향에 맞는 엽서를 파는 곳도 꼭 들른다. 커지고 길어진 그 길을 넷이 꼭 붙어 함께 걷는다. 우리에게 여행은 더욱더 열렬히 서로가 서로의 곁에 붙어 있기 위한 다짐 같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듯 꼭 붙은 우리는 온전히 그 시간 속에 같은 추억을 붙여넣는다.     


  익숙한 듯 달라진 길을 가다 보니 이색적인 소품 가게가 나타났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들어가 보니 그 가게는 공정무역을 통해 태국 등지에서 가져온 핸드메이드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기계로는 흉내낼 수 없는 색색깔의 실로 수놓은 각종 물건들이 가득했다. 가방이며 지갑, 컵받침, 브로치, 드림캐처 등 이국적이고 다양한 물건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함께 가게에 들어왔지만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른 물건들을 살피며 잠시 각자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다 딸과 내가 같은 코너 앞에서 멈춰섰다. 손으로 만든 인형이었는데 지금까지 어디서도 본적 없는 인형이었다. 게다가 얼굴 표정이 저마다 다 달랐고 머리 모양이며 옷도 각양각색이었다. 딸과 나는 바구니에 담긴 많은 인형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무엇이 자기 취향인지 열심히 이야기 중이었다. 하지만 작은 사이즈에 비해 가격이 다소 비싸게 느껴졌다. 태국 아주머니들이 한땀한땀 수작업으로 만들었고 인형의 표정은 만든이의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서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안내문이 꽂혀 있었다.      


  딸과 나는 가격과 취향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 남편은 자기가 사 주겠다며 어서 고르라고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가족 모두 자신의 인형을 하나씩 사자고 제안했다. 남편도, 둘째도 즐겁게 동의했다. 우리는 바구니 속의 인형들을 더욱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마냥 열심히 찾았다.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지만 아직 찾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고른 서로의 인형은 묘하게 서로를 닮아 있었다. 평소에도 웃으면 눈이 사라지는 나는 내 눈과 비슷한 눈을 가진 인형을 골랐다. 큰딸은 활짝 웃는 모습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며 웃는 것도, 그렇다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엷게 미소 짓는 인형을 골랐다. 남편은 자신을 닮아 머리가 크고 숱이 많아 사자처럼 머리가 흩어진 인형을 골랐다. 둘째는 자신의 머리 스타일과 유사한 단발머리에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원피스가 입혀진 인형을 골랐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값을 치르고 인형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황리단길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유래없는 인형 이름에 대한 논쟁이 오고 갔다. 내가 먼저 ‘행복’의 ‘행’자가 이름에 들어가면 어떠냐고 했다. 모두들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좋은 이름을 선점하려는 듯 내 인형의 이름을 ‘여행(旅行)’이라고 하겠다고 공언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여행을 떠날 때 작은 인형 하나를 캐리어에 넣고 다니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진찍는 것을 그리 부지런하게 하지 않는 나는 나 외에 다른 누군가가 이 여행의 풍경을 함께 느끼고 담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인형이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나라를 많이 여행하고 싶었기에 나의 바람을 담아 ‘여행’이라고 짓고 싶었다.     


  그러자 남편이 ‘수행(修行)’이라는 이름은 어떠냐고 했다. 늘 자신을 갈고 닦으며 수행하듯 살아가는 삶이 좋지 않냐고 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인형 이름으로는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행하며 살아갈 그의 인생을 생각하니 뭔가 고달프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 속마음을 내비치자 남편은 ‘동행(同行)’이 좋을 것 같다며 한결 환한 얼굴로 얘기했다. 가족들과 늘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모두들 동행이 수행보다 훨씬 좋다며 찬성의 박수를 보냈다.     


  큰딸은 ‘다행(多幸)’으로 짓겠다고 했다. 자신은 많은 일들 앞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 앞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안도하고 감사하는 마음가짐은 분명 좋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혈기 왕성한 10대 중학생이라면 좀 더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이름이 좋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단어들을 떠올렸지만 큰딸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그 이름으로 확정지어 버렸다. 남편이라면 몰라도 자식에게는 점점 자신만의 선택영역을 넓혀 주어야 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에 얹힌 말을 하지 않고 꿀꺽 삼켰다.     


  둘째는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행’이 들어가는 단어 자체를 잘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생이라 또래보다 모든 것이 많이 늦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비행(飛行)’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 누구보다 높이 날아올라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 날아오를 준비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비행’ 이 어떠냐고 하자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너가 앞으로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올라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둘째는 흔쾌히 그 이름을 인형에게 선물했다.     


  우리는 인형을 한데 모아 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사진에 남았다. 우리가 함께 동행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삶이라는 여정을 여행하고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험난한 파도 속에서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만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지금보다 더 높이 날아올라 비상할 날을 여전히 꿈꿀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책상 위에 놓인 행복과 눈을 맞춘다. 일순간 사소한 행복이 내 것이 된다.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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