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 흔적

사소한 행복

내게 머문 마음

by 신혜정

바로 그 날이었다. 보통은 그보다 하루 전에 연락이 오기도 한다고 했다. 전날 연락이 없었으니 적어도 그날까지는 기다려 보고 싶었다. 모르는 번호가 오면 보통은 받지 않는데 괜히 받아보곤 했다. 내가 낸 신문사가 지방이라 그 지방의 지역번호가 뜬 건 아닌지 전화가 울릴 때마다 뚫어져라 번호를 봤다. 하루종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전화를 기다렸지만 연락은 결국 오지 않았다. 나의 신춘문예 공모는 올해도 실패로 끝났다.

연락이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쓴 글을 다시 읽으며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 순간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제출하려니 마음에 드는 글이 하나도 없었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엄선하여 딱 한 군데만 공략하기로 했다. 더 많은 공모전에 제출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니! 작전 실패라기보다는 글쓰기 실력 부족이 원인이겠지. 정답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속만 더 상한다.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글쓰기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4년 동안 2주에 한 편씩 빠지지 않고 글을 썼을 뿐이다. 잠시 개인적인 사정으로 몇 달 쉰 적도 있지만 지난 4년은 글쓰기가 내 삶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출판으로 책도 내 보고, 함께 쓰는 글지기에게 매번 나의 글을 보여주며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글에 대한 애정은 성실의 원동력이 되었고 시간이 쌓이며 나의 글을 공모전에 내 보기도 했다. 나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결과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늘 하게 된다. 내게 당선이라는 큰 선물이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행복의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쩌면 예상한 대로 신춘문예 공모는 낙선이었다. 여러 신문에 실린 당선자들의 글을 읽으며 절로 감탄이 나왔다. 나의 글이 얼마나 더 자라야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저렇게 잘 쓸 수나 있을지 나의 미래가 막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가까운 도서관으로 갔다. 더 많은 작가들의 책을 읽고, 더욱 가열차게 쓰는 것만이 당선을 내 것으로 만들어줄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신간 코너로 갔다. 어깨동무를 한 듯 몸을 밀착하여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사이로 꼭 읽어보고 싶던 작가의 책이 떡하니 꽂혀 있었다. 누가 가져갈세라 잽싸게 책을 품에 안았다. 다음 칸, 그다음 칸으로 시선이 옮아갔다. 장바구니에만 넣어두고 아직 주문하지 못한 또 다른 작가의 신간이 거기 있었다. 이 책을 만나려고 하필 이 시간에, 수많은 도서관 중에 이 도서관으로 왔나 싶어 잠시 운명론자가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고이 품고 온 신간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바른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함을 알지만 언제나 애정하는 책은 푸근한 침대에 앉아 읽게 된다. 베개 하나는 등에 대고, 또 하나는 무릎에 얹고 그 위에 고귀한 신간을 앉힌다. 작가소개부터 프롤로그를 지나, 수많은 글 숲을 거닌다. 글 숲에서 만난 문장 중에 내 마음에 꽃을 피우는 글귀가 있으면 포스트잇도 붙인다. 누가 나를 부르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그렇게 글 산책을 한다. 어느새 에필로그에 도착하고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온몸과 마음이 글로 채워진 것 같다. 고요히 내 마음에 고여있던 글은 형태를 달리하여 나의 글로 다시 태어나고, 내가 쓴 글은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글 숲을 만들 것만 같아 설레기 시작한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방학이지만 온종일 학원이나 스터디 까페를 다니느라 얼굴 보기 힘든 큰딸이 모처럼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마침 남편도 일찍 오고 아주 오랜만에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온기가 가득한 밥과 가족들이 좋아하는 반찬들, 식탁의 화룡점정이 되어 줄 이야기꽃까지 피었다. 하루를 살아내며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들이 식탁 위에 피고 진다. 웃고, 떠들며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성글지 않도록 사랑과 관심으로 촘촘히 메워나간다. 오늘 하루도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다하고 안전하게 다시 모여 있음이 괜히 가슴 뭉클했다.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낙선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돌아보며 처음에는 실망감이나 절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컸었다. 글을 쓰며 행복했고 뿌듯했던 순간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시간이 낙선과 닿아 있어서인지 결과적으로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모든 과정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계속 글을 써나가며 분명 나의 글이 성장한 부분도 있을 텐데 그것을 측정할 수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으니 나는 그저 제자리 걸음이거나 심지어 퇴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매년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 당선이 내 것이 아니면 죄다 불행할 것만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주변은 불행보다 행복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눈여겨보지 않아 그것이 행복인지 몰랐을 뿐 수많은 행복들이 이미 내 것이었다. 원하던 책을 만나 설레며 집으로 돌아오고 그 책을 읽으며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 나에게 가족이 있음이, 내 삶의 크나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 그들이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순간에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고 내 품으로 오는 그들이 있다는 것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당선처럼 삶의 획을 그을 만큼 엄청난 일이 내게 온다면 물론 행복할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기뻐할 것이고 그만큼의 책임과 무게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런 일들이 내 삶의 곳곳에 예정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내 삶이 불행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쩌면 당선은 내게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사소한 날들이 없었다면 이미 글쓰기를 놓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커다란 행복이 아니라, 매일의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다. 사소하고, 흔해 빠져서 언제든지 손에 잡히는 삶의 행복들을 차곡차곡 모아야겠다. 그 소소한 행복의 집합체가 낙담하는 시간 속의 나를 일으켜 세워줄 것만 같다.

우울했던 마음을 접고 또다시 신춘문예를 준비한다. 내 곁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소함을 오늘도 글 속에 녹여본다. 당선을 꿈꾸며 오늘도 부지런히 글을 쓰는, 나는 행복한 낙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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