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 흔적

취향 공동체

네게 머문 마음

by 신혜정

마음이 가서 손이 자주 갈 수밖에 없는 물건들이 있다. 취향은 때로 사소한 물건 속에 깃드는데 여행지에서 사 온 양말이 그랬다. 나는 줄무늬 양말을 좋아하는데 그 양말은 색의 조화가 정말 멋졌다. 그걸 신고 나가면 꼭 한 번은 예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헤질 때까지 신은 몇 안 되는 양말이었다. 안목은 거듭되는 실패 과정을 거쳐 일상 속의 도구에서도 이어진다. 여러 제품을 거친 후, 리필심을 몇 번씩이나 교체해서 안착하기에 이른 볼펜이 그렇다. 스르륵 미끌어지는 필감이며 찌꺼기가 나오지 않는 깔끔함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듯 내 돈과 귀한 시간을 들여야만 겨우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취향인데, 타인이 건넨 물건에서 나의 결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그 상자를 줬을 때 적잖이 놀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받기를 주저하자 그녀는 별거 아니라며 상자를 내밀었다. 내가 다이어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 다이어리 만드는 일을 하는 친구에게 부탁했다며 정말 별거 아니라는 말을 강조했다. 무려 수제 다이어리였다. 그것도 내가 살까 말까 망설이던 가죽 다이어리였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게 전부였으며 그녀에게 도움을 준 적도, 선물을 준 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선물이 과분한 듯 했지만 다이어리라는 말에 어쩌면 마음보다 손이 먼저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복도에 선 채 짧게 마음을 나눴던 우리는 그날 이후 6개월이라는 긴 휴직에 함께 들어갔다.

건강한 줄 알았던 딸이 갑작스레 수술을 하게 되었다. 딸의 간병을 위해 나의 일상은 멈추었고 휴직이 시작됐다. 밝게 웃으며 그녀와 인사를 나누던 내가 언제부턴가 낯빛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나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녀가 건넨 한마디에 그간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 또한 나처럼 딸을 키우는 엄마였기에 함께 울어주었고 그녀의 눈물이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걱정과 불안 속에 잔뜩 움츠러든 나를 응원하기 위해 그녀가 건네주었던 것이 바로 그 다이어리였다.

갈색 가죽 재질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다이어리는 내가 늘 눈여겨보고 있던 것이었다. 작아서 자리 차지를 많이 하지 않으며, 가죽 재질이라 쓸수록 손때가 묻어나는 모양새가 무척 좋았다. 하지만 이미 다른 다이어리들이 많은데 또 사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구매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충분히 내 취향이었지만 실제적인 쓸모 앞에서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 그녀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게 그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더구나 딸의 수술로 인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당겨와서까지 걱정하며 마음이 온통 걱정과 불안으로 넘쳐나던 때였다.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둘 수 없어 어딘가로 흘려보내야만 할 것 같은 마음들이 그 다이어리에 모두 모였다. 다이어리는 휴직 기간의 버팀목이자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면 고요히 책상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잘 지낼까 묻지 못할 안부가 궁금해지곤 했다.

6개월이 지나고 감사하게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육아휴직을 마치고 나와 함께 복직했다. 우리는 6개월이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고 다른 층에서 근무하게 되어 잘 만나지도 못했다. 일상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시간은 생각보다 성실하게 흘렀다.

잠시 쉬었던 직장에 적응하는 사이 어느새 한 해가 다 가고 있었다. 그녀는 또 한 번 별거 아니라며 내 손에 종이가방 하나를 쥐어주었다. 가방 안에는 양말 두 켤레와 눈여겨보던 행주가 들어있었다. 마치 나의 검색기록이 모두 그녀에게 전송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양말을 좋아한다. 다양한 색깔의 양말을 옷 색과 맞추어 신는 것을 패션의 완성이라 생각했다. 해외여행을 가면 좋아하는 브랜드의 양말을 꼭 사오고 어딜 가든 취향의 양말이 있는지 눈여겨보곤 한다. 최근에는 정장을 입을 때 필요한 단색 양말이 필요했다. 의자에 앉을 때 바지와 양말 사이에 맨살이 보이는 것이 싫어 목이 긴 양말을 찾고 있었다. 그날 그녀가 건네준 가방에는 내가 꼭 사고 싶었던 목이 긴, 회색과 베이지색 양말이 들어 있었다.

행주도 그랬다.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여러 종류의 행주를 써 보며 취향을 찾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런칭한 그 행주가 눈에 띄었고 호기심에 주문해 보았다. 잘 마르고, 잘 닦이며 색 또한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이었다. 더 주문할까 싶어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행주였다. 바로 그 행주가 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얼마 전 그녀는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다이어리며 양말, 행주에 이어 그녀가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글쓰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했단다.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수줍게 전했다. 그녀는 언젠가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자며 만남까지 제안했다.

우리는 다음 부서 이동 때 같은 부서를 지원하자며 급하게 동맹을 결성했다. 취향이 비슷한 우리가 함께 일하면 호흡이 척척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야기해 보지 않은 다른 분야의 취향까지도 완벽히 일치할지 모른다는 흥분된 마음이 일었다.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는 과정은 마치 서로의 마음 지도를 공유하는 일과 같았다. 물리적 거리는 여전했으나 마음의 위도는 이미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예전과 달리 자주 만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다. 하지만 마음에서 느껴지는 친밀도는 급상승했다. 그것이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취향이라는 매개체가 있는 한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취향은 참 이상하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보게 한다. 그녀가 주인공인 이 이야기를 보여주고 이 또한 그녀의 취향에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글쓰기 다음은 무슨 취향을 알아볼까? 아니다. 더 이상 취향 탐구는 끝내도 좋을 것 같다. 그녀와 나 사이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흐르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녀가 준 양말을 신고 현관을 나선다. 우연히 그녀와 만난다면 바짓단을 살짝 걷어 양말을 보여주어야겠다. 그녀는 아마도 활짝 웃을 것이다. 그 미소야말로 내가 수집하고 싶은 가장 다정한 취향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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