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머문 마음
신랑 신부의 부모님들이 두 손을 꼭 잡고 버진로드에 선다. 몇 십년 전의 그때처럼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함께 한 긴 세월을 밟으며 아들 혹은 딸이 걸을 그 길에 축복의 발자국을 새기는 것 같다. 드디어 신부가 입장할 차례다. 문이 열리며 새하얀 웨딩드레스 물결이 계단을 흘러내린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지고 사진찍는 손길이 바쁘다. 부모님이 새겨 놓은 축복을 따라가 신랑과 만난다. 신부 혼자였을 때보다 신랑과 함께 있으니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성혼선언문 낭독에 이어 부모님들의 축사, 지인들의 축가가 이어지고 신랑과 신부는 각자 걸어왔던 버진로드를 함께 걸어 나간다. 뭔가 빠진 것 같다 싶더니 주례가 없었다. 지루해서 아무도 안 듣더니 아쉽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나?
내가 결혼할 즈음에는 주례가 없는 결혼식은 드물었다. 주례를 맡아 줄 사람이 없으면 예식장에 소속되어 있는 전문 주례사에게 돈을 주고 주례를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나와 두 살 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은 주례없는 결혼식을 진행했는데 당시만 해도 큰아버지는 그런 형태의 결혼식에 불만을 표출하셨다. 주례가 없다는 건 꼭 갖추어야 할 예를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주례가 없는 대신 지인들의 축하 메시지를 담은 동영상이 상영되었고 집안 어른들께서 축사를 하는 형식으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형식적인 주례사보다 훨씬 의미있었고 세련된 느낌까지 들었었다.
주례사는 세월 속으로 사라지는 추세인데 나는 오래전부터 주례를 서 보고 싶었다. 여자 주례를 본 적도 없고, 나에게 주례사를 부탁할 사람은 더더구나 없는데도 꽤 오래전부터 주례를 서는 꿈을 꾸곤 했다. 머리가 희끗한 남자분들이 주례의 주요 스카웃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주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비슷한 래퍼토리로 주례사의 상당 부분을 채웠다. 우아한 투피스 정장이나, 단아한 한복을 차려입고 부드럽지만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로 삶의 지혜를 나누는 여성 주례는 왜 없을까 늘 의문이었다.
사실 주례는 신랑이나 신부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서 해야 그 의미를 다할 수 있다. 단지 형식을 갖추기 위해 신랑신부와 상관없는 사람이 주례사를 한다는 건 하나마나한 일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주례를 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누군가의 인생에 의미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를 결혼식에 초대해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을 만큼 그들에게 귀감이 되고 보탬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주례사는 일명 가, 나, 다 주례사다.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의미를 담고 싶다. ‘가’는 ‘가족을 사랑하라’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사람들, 이 세상과 만나 처음으로 인연을 맺고 가장 오래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성장해 나간다. 예외적인 경우들로 인해 가족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배우기도 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높여라’ 다. 결혼은 혼자서 살다 둘이 함께 살아가는 생의 여정이다. 그러다 보면 나보다는 상대를, 혹은 아이가 삶의 주가 되곤 한다. 하지만 어떠한 순간에도 나를 잃지 말고, 나 자신의 가치를 높여 나가기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를 위한 시간이 존재할 때 서로 간의 관계는 더 건강하고 단단해진다.
‘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 다. 가족을 사랑하고 나를 아끼는 일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다른이에게 건넨 배려는 반드시 그 몸을 불려 더 큰 배려로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한 선순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술이라기 보다는 삶을 대하는 바른 태도라고 믿는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문득,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과연 가족을 사랑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가 말이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가치를 두는 곳이 ‘가족’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상처를 주는 순간도 분명 있다. 세탁기에 넣지 않고 아무렇게나 벗어 둔 양말처럼 별것 아닌 일에 가시돋힌 말이 나가기도 하고 더 참아야 할 순간에 나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기도 한다.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상대에게 내 마음이 사랑으로 전달되지 않고 짜증이나 분노로만 표현된 건 아닌지 괜히 뜨끔하다.
나의 가치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또 어떤가? 더 열심히 배우고 학습하며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계획을 늘 세운다. 어떤 계획은 무사히 실천되어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계획에만 머무르다 자취를 감추는 것도 허다하다. 요즘은 건강에 관한 결심들을 자주 하곤 한다. 매일 운동을 하겠다든지, 커피를 끊겠다는 결심같은 것들 말이다. 지켜지기도 하고, 때로 쉽게 허물어지기도 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정말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많다. 나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한 행동이 오히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 뒷통수가 따갑다.
가, 나, 다 주례사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주례사였나보다. 신랑 신부의 앞날에 축복의 발자국을 새기겠다던 호기로운 다짐은 어느새 내 삶의 흐트러진 발자국을 점검하는 체크리스트가 되어 버렸다. 주례사에 걸맞게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지 모르겠다. 지루하고 의미없어서 하나마나한 주례사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겠다.
결혼식장 단상 위, 꺼져있는 마이크를 바라본다. 언제쯤 이 주례사를 나 아닌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을까? 나의 주례사는 그 마이크가 켜지는 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