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미 이치로의 방구석 1열 인생 상담
심리상담가라기보다 작가라는 게 어울릴 정도로 유명한 게 아닌가 싶다. 임상에서 나오는 세심한 관찰과 배려 깊은 경청 그리고 따뜻한 감성과 문체가 그의 책을 반갑게 한다. 워낙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가 이렇게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의 영화를 통해 삶에 대한 통찰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의 애씀이 반갑고 고맙고 그랬다. 소개되는 19편의 영화는 거의 대부분 보지 못했지만 보지 않아도 장면 속 인물들의 심리가 그려질 만큼 충분했다.
기억이라는 게 잊히는 건 자연스러워도 지운다는 건 왠지 부자연스럽고 부정적이다. 나쁜 그리고 부정적 기억을 지우고 좋은 그리고 긍정적인 기억만 남기는 게 삶에 어떤 의미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궁금하다.
작가는 결국 과거의 기억을 과거의 시점이 아닌 현재, 지금의 시간에서 과거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의미가 바뀐다는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무리 힘든 시간을 지났다 하더라도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라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렇게 이미 벌어진 나쁜 일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써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이라 한다.
좀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철학자와 19편의 한국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상담 내지는 철학적 대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왜 상담가가 아니라 철학자일까? 치료를 위한 처방이 아니라서? 여하튼 어떤 결론을 내려주지 않으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이끈다.
사랑을 라면으로 치환 시켜버린 익숙한 영화의 한 장면에서 촉발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끝날 정도로 몰입된다. 하지만 미처 보지 못해서 영화의 장면이 궁금해져 읽는 걸 자주 멈춰야 했다.
"뭔가를 분명히 말하거나 정하는 일에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은수 씨가 정해 주기를 바란 거죠." p35
놀라운 사실 하나. '자신이 결정하지 않고 상대가 결정하게끔 하는 사람은 오히려 지배적인 성향의 사람일 수 있다'니. 평소 선택지 앞에서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아내가 결정하게 하는 나는 그런 성향인 사람이었을까? 나는 상대가 편한 것을 선택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배적이라니. 대략 난감이다.
그 유명한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에 철학자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려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라 노력이 필요한 일'임을 명확히 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애타게 노래하는 박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이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철학자는 말이 된다고 하고 노랫말은 말이 안 된단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디 어려운가 보다. 결국 사랑을 시작하고 변화된 관계에서 상대에게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문제가 문제인가.
'알싸한 감정'이라니. 생각해 보니 내게도 그런 감정이 있다. 첫사랑이 아니어도 설렘이 있던 사이가 지나고 보면 아련한 감정이 드는 사람. 요즘 말로 썸이라던가. '건축학 개론'의 승민과 서연처럼. 한데 당최 기억이 나질 않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납득이가 손을 하늘로 비비꼬아 올리던 장면만 선명하다니. 오래전에 썼던 영화 리뷰에는 '첫사랑의 기억을 뒤적이게 만드는 영화'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기억의 끝에 떠오른 알싸함. 장애인이 된 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십수 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 SNS가 없었다면 영영 기억에만 있었을. 스콜피온스의 윈드 오브 체인지 엘피를 건네며 받는 나보다 더 환하게 웃던 친구. 어딜 다녔고 누구와 다녔고 내 기억에선 뭉텅 잘려 나갔지만 기억은 물론이고 그때의 사진도 가지고 있는, 그 추억이 행복하다는 그 친구와 통화는 딱 그 때로 시간을 돌렸다. 한참 통화 끝에 그 알싸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도 동반한. 장범준이 그랬다. "사랑 때문에 노랠 연습하는 건 자연의 이치"라고. 스콜피온스가 독일 애들인지 영국 애들인지 록발라든지 해비메탈인지 구분도 못하는 음악을 아는 채 했던 그때. 사랑까지는 아니었다지만 알싸하긴 했던 터라 이제 와 손 한 번 안 잡아 본 게 아쉬운 마음도 드나 보다.
매사를 복잡하게 생각한다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 잘못된 것일까? 너무 쉽게 그래서 인생에서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복잡함을 다르게 보면 신중하다는 것일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쉬워서 가벼운 것보다는 다소 복잡해서 진지한 게 낫겠다 싶다.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으며, 행복은 성공과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미래를 담보로 성공만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자신을 옥죄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싱글 라이더'의 재훈을 통해 메시지를 준다. 영화를 아프게 본지라 재훈의 상실과 공허가 다시 한번 먹먹했다.
"삶이 고달플지라도 내일이 오늘의 연속이 아닌 인생은 불행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내일도 똑같은 날이 펼쳐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은 지루하다." p312
인간은 선과 악의 구분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뿐이라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빗대 설명한다. 그게 악일지라도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은 선이 되는 일.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며 인간의 탐욕이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일을 어쩌면 가장 인간적 본능이 가장 비인간적일 수 있는 일을 '버닝'의 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너무 어둡고 따끔거리듯 불편해 보다 말았던 영화였는데 잠시 볼까를 망설인다.
"리더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지도자,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여야 좋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재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더가 믿고 지켜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p338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혜경을 통해 리더의 존재를 설명하는 내용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가뜩이나 뒤숭숭한 조직 내에서 리더의 역할을 곱씹게 된다. 도대체 튀고 싶어하고 존재감만 부각하려는 리더들을 어쩌면 좋은지. 재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출근 길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이젠 다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