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안겔라의 낯선 듯 다정하게 살기
"일면식 없이도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절박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며 힘이 되어주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숨구멍이 되어주고, 난로가 되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p5
그 어떤 철학 혹은 인문을 주제로 한 책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에세이를 읽었다.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 같은 안겔라를 알게 돼서 기쁘다.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게 아쉽다. 때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때로는 무겁고 진중하게 그녀의 멜로디가 떠다니는 것처럼 그녀의 활자가 내 공간에 쿡쿡 박히는 기분이 든다. 어쩜 이리 글을 잘 쓰는지.
인간을 향한 통찰과 이해 그리고 따뜻함, 담을 수 있는 건 다 담아낸 손에 꼽을 만큼 좋은 책이다. 아니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책이다. 아주아주 오래 기억될, 기억해야 될 책이다.
저자가 10여 년을 낯선 독일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찾은 행복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그렇게 낯선 이에게 내어준 행복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기를 주저한다. 그랬던가? 대한민국에서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낯선 이에게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의 정도를 베풀고 있을까? 낯선 경계 혹은 날선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우린 길가에 누워있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혹은 딸일지도, 아버지나 어머니였을 사람들을 냄새나고 더러운, 패배자고 기피해야 할 인간이 아닌 별개의 종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또 곳곳에 보이는 힘없는 약자와 장애인들에게 그들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어줄 용의가 있을까. 대한민국에서는 던진 부메랑이 있다 해도 그 부메랑은 돌아올 방향을 여전히 찾지 못해 날고만 있는 건 아닐까. 씁쓸하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 장애이해교육을 나간 적이 있다. 사실 용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애를 이해하는 교육이라니. 아이들은 이미 누구나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다만 공감을 못하는 것일 뿐. 나와는 별개고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일 뿐.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린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의 장애 출현율과 복지국가들의 장애 출현율을 비교하며 아이들에게 "왜 우리나라보다 핀란드가 장애인이 더 많을까?"라며 질문을 던졌다. 한 학생이 거침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딱 봐도 자유분방하고 까불까불할 것 같은 아이.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다 그리로 이민을 가서요."
뒤통수를 맞을 것처럼 눈이 번쩍 띄었다. 저 아이의 눈에는 대한민국의 복지란 형편없음을,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없이 그저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듯이 시혜적이 복지가 최선인 것처럼 포장하고 선거철에만 유용한 복지라는 걸 다 들켜버린 듯했다.
인권은 더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없는 가장 약한 자의 수준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처럼 복지는 가장 약한 자가 살기 위해 지급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함께 나누는 것이다. 누구나 늙어가고 노동력을 잃고 장애가 생긴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래서 복지는 사회보장은 필요하다. 다만 누구는 인생에서 조금 먼저 시작하고 좀 더 필요할 뿐이다. 예외 없다. 나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공부 안 하면 저 사람들처럼 돼."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없는 우린 정말 부메랑을 던지고나 있을까. 갑자기 독일이 '구경'하고 싶어졌다.
참을 수 없었다. 혼잣말로 하기에는. 그냥 활자로 지워지지 않을 만큼 꾹꾹 눌러 기록하고 싶었다. '대구, 서울 그리고 코스닥'을 씨부린 그 인간에게 또라이 새끼라고 말이다. 에이, 기분 더럽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한 번씩 감기 몸살을 앓으며 복습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p35
알까? 안젤라를 안겔라로 발음하는 그녀가 자기가 한 저 말에 한참이나 울컥해진 지구 반대쪽 행성에 사는 외계인도 있다는 것을? 그 외계인이 어쩌면 친구가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가 더 이상 쓰지 않는 말들>을 읽으며 얼마 전, 아니 그전에도 종종 그랬다. 아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이 배달되었다. 한참을 기다린, 마음에 든다며 몇 번이나 나에게 어떠냐고 묻던 옷. 한데 입어 보고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며 반품을 해야겠다고 하길래 핀잔 겸 타박을 했다. "또? 이게 몇 번째야? 사는 것보다 반품 비용이 더 들겠다."라며 가뜩이나 기분 상해있는 아내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살을 빼서 입지 그래?"라고까지 했었다. 근데 옷이 사람이 삼킨다는 말에 반성했다.
제목을 보면서 어쩌면, 나는 어쩌면 이 책이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사람이나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 그러니까 장애인이나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면 하고 바랐는지 모른다.
지구 반대편에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담은 그녀의 사이다 같은 발언은 여기,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란 얼마나 힘겨운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솔직히 이 책은 예상 밖의 책이다. 피아노 연주자의 이야기겠거니 혹은 인간 탐구에 대한 가벼운 개인적 철학 이야기겠거니 했다. 그래서 초반 펼쳐지는 안겔라와 함께 사는 화성인 남자와 그들의 아들 다니엘의 이야기에 10여 년의 이민자 혹은 이방인으로 행복의 부메랑을 날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이야기고 따뜻하고 재치 있고 인간적 '끈'을 놓지 않는 그녀의 이야기 정도, 딱 그 정도인 줄 알았다. 가볍고 기분 유쾌해지는 이야기. 그런데 가면 갈수록 궁서체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그것도 아주 두꺼운 궁서체. 진지해지고 강렬해진다.
"왜 독일에 왔어요?” 보통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서 먼저 인사라도 하고 난 다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기 마련인데, 그렇게 대뜸 약간 화난 듯한 표정으로 고향을 묻는 사람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고 얼떨결에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고 말았다. 그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먼저 언급했어야 했다는 후회는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뒤늦게 밀려왔다. 남편의 유학 때문에 독일로 오게 되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중얼거리던 혼잣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동네에 왜 자꾸 중국놈들이 오는 거야…." p254
사실 그녀가 가자마자 이방인의 삶이 아니라 원주민의 삶을 산 건 아니다. 중간중간 그녀가 겪었던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로 '나 사실은 조금 상처도 받았어.'라는 하소연도 있다. 동네 마트의 빨간 머리 아줌마나 뾰로통 해서 왜 우리 동네에 왔냐고 날을 세우는 사람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고 다가서려 노력했던 그녀가 견뎌내는 이방인의 삶을 응원한다. 그녀의 말처럼 우린 모두 이방인이 아닌가. 제주도에서 3년 살았던 나도 '육지 것들'이란 말을 자주 들었더랬다.
인간이 왜 인간인지에 대한 나름의 정의와 그렇지 못한, 인간 같지 않은 인간에 대한 안쓰러운 질책. 그렇게 그녀는 김기춘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인간다움이 뭔지 배울 의지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304개의 우주를 지워버린 그것들이 꼭 읽었으면 한다.
한참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를 두고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복지수준에서야 당연 보편복지는 꽤 여러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나 국가의 재정이나.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복지일지 모른다.
"부모의 소득이 다 다른데 같은 학비를 내는 게 오히려 공저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복지를 우리나라 국민 수준으로 잣대를 들이대면 그저 미친놈 소리만 들을 게 뻔하다. 하지만 진짜 복지는 불공평을 정당하게 여길 줄 아는 수준은 되어야 할만하다. 똑같은 교육을 받는데 "왜 나만 더 내?"라는 부당함을 내세운다면 애초에 그 교육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떤 게 진정 배제되는 것인지 관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누구나 공정한 보편 복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정치인이 많아도 너무 많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여타 공화나 사회, 공산주의 등 여러 이념을 거쳐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 역시 부의 집중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도를 넘었고, 그로 인한 사회구조적 부조리는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처럼 다양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이념이 등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힘없는 소수의 생각이 무시되지 않고, 특히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일 사람들을 보면서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좀 더 오래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불평등하지 않은 세상.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근로를 하는 사람은 임금의 격차나 인간적 대접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들이 슬프게 부러웠다.
그리고 이제 막 유치가 빠진 유나가 안겔라에게 했던, 안겔라가 허를 찔린 듯 받아야 했던 "아줌마는 요즘 무슨 일이 제일 재밌어요?"라는 질문에 가슴이 저 만큼 내려앉았다. 아주 오래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도대체 나는 무얼 재미있어하는지. 재밌어했던 것들을 찾는 동안 나는 점점 어려지고 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