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시험을 망쳤습니다만

by 암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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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네 자식 낳아보면 에미 맘 알 거다!"


그땐 저 말씀이 참 모질고 아팠습니다. 어머니가 딱 30년 전에 제게 하셨던 말씀이셨어요.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입시를 비관할만한 성적은 아니었는데 2학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갑자기 제가 체대를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렸거든요. 몸이 약한 동생을 데리고 체육관을 다녔는데 관장님의 꼬임에 빠졌죠. 당시에는 제가 운동을 참 잘했거든요. 밥 먹는 것보다 운동하는 게 더 좋을 만큼 좋아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부모님 생각에는 장남은 번듯한 일을 해야 했나 봐요. 솔직히 뭐가 번듯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땐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학력고사 세대(89학번)인 저는 대학은 무조건 가고 봐야 하는, 심지어 대학을 못 가면 인간 취급 못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졸자의 취업은 애지 간 하면 보장되던 때였던지라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죠.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운동선수가 아니라 체육 선생님이 되겠다고 겨우 승낙을 받고 체대에 들어갔어요. 체육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1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사고로 목이 부러져 더 이상 운동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요. 이때 어머니는 끝까지 반대 못하신 걸 비통해하시다가 혼절하셨어요.


그리고 30년 후. 며칠 전, 딸아이가 수능을 치렀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공부를 곧잘 하던 딸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게 했죠. 키도 크고 인성도 남부럽지 않아 딸 부심도 있었고요. 그런데 모의고사에서 줄곧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아이는 정작 시험을 망쳐버렸습니다. 2등급이나 떨어진 성적에 울고 불고 합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망연자실해집니다. 마음이야 갈기갈기 찢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운 감정은 바닥까지 내려앉습니다. 양가감정을 넘어 수십 가지 감정에 휩싸입니다. 안쓰럽고 아프고 답답하고 실망스럽고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아빠도 처음이지만 더군다나 수험생 아빠도 처음인지라 상심하는 아이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다 괜찮다 위로하자니 망쳐버린 수능으로는 기대했던 대학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대학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꾸 실망스러운 마음이 치솟아 그렇게 위로를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그러셨을까요? 아들에게, 어찌 보면 끔찍하게 여긴 장남이 당신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의 실망감에 잘해보라며 지지해 주지 못하시고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끌어다 반대하는 이유로 삼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아직 닥치지도 않은 딸아이의 미래를 끌어다 이런저런 기대 낮은 대학은 가봐야 의미도 없다고 지지는커녕 조언이랍시고 아이 가슴에 비수를 꼽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반대하시면서도 마음은 많이 아프셨을까요? 제가 아이에게 현실적으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며 날 선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은 이리 아프니 말입니다. 이틀 사이에 퉁퉁 부은 얼굴을 보자니 마음이 편칠 않지만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어머니가 그처럼 모진 말씀을 하셔야 했는지, 왜 내가 아이를 낳아봐야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거라 하셨는지. 그게 어머니의 잔인하고 모진 말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 깨닫지만, 딸아이는 지금 아빠에게 잔인하고 모질다고 생각하겠죠. 현실을 외면하고 뭐든 잘 될 거라 괜찮다 괜찮다 하지 않는 아빠가 얼마나 서운하고 미울까요. 아이도 30년쯤 지나면 아빠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한숨만 깊어지다 하루가 또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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