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날만 빼고 다 좋던 날들.
제주도 집은 노래 가사처럼 '그림 같은 집'은 아니었어도 편안했던 집이었다. 급한 마음, 부랴부랴 짐을 싸고 바다를 건넜다. 여기저기 집을 찾았다. 살 집은 많았지만 마음에 드는 우리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임시로 머물렀던 처형 지인의 아파트에서 그냥 눌러앉았다.
내 집은 아니었어도 아담했고 따뜻한 볕이 많이 들어 편안하고 즐겁게 살았다.
코 앞에 바다가 있고 살짝 게으름을 부려도 차가 밀려 지각 같은 건 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교통 체증은 바다 건너 육지에나 있다. 이런 여유 말고도 눈에 확 띄는 변화는 딸아이에게도 있었다.
서울 대치동이나 강남은 아니었어도 분당 언저리에서 살았던 터라 근처 어린이 집을 다녔다. 딸아이가 영재는 아니었어도 알파벳과 영단어 몇 개는 알았더랬다. 거기다 한자 8급의 자격증을 지닌 능력자라면 능력자였다.
아빠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길에 차비라도 되는 양 큰소리로 산이 보이면 "아빠! 마운틴!", 거대한 홍보용 풍선이 보이면 "아빠! 벌룬!", 자기와 눈도 안 맞춰주는 무심한 고양이를 보고서도 "아빠! 캣!" 등등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치며 지 혼자 신나서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그런데 제주도 이민 후, 어찌나 현지 적응이 빠른지 어린이 집을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 짧아졌다. 퇴근하고 들어 오는 나를 향해 이런다.
"아빠 밥 머건~"
하루는 자는 애 옆에 누웠더니. "아빠! 절루가! 아이, 쫍짭해!"라며 짜증을 냈다. 그렇게 현지 적응을 빠르게 하던 딸아이는 매일 오름이며 바다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피부는 까매지고 그나마 읇조리던 알파벳은 고사하고 영단어와 표준어 대신 사투리를 채워 나갔다. 이런 마당에 한자 8급의 능력이 남아 있을 턱이 있을 리가.
그렇다고 아이만 신나고 즐거운 시절은 아니었다. 주중에 아무리 힘들었다가도 주말만 되면 그냥 재충전이 됐다. 어딜 가도 시퍼런 하늘과 바다가 있었다. 거기에 거대한 라퓨타 구름까지.
차 트렁크에 라면에 냄비와 가스버너, 낚싯대는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냥 나서기만 하면 그냥 힐링 여행이었다.
집에서 좀 쉬자는 아내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방파제란 방파제를 비롯해 남들이 안 가는 곳들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인생 처음 해보고 맛 들인 낚시와 하고 오름은 못 올라도 봉(오름보다 얕은 산)도 오르고 사진도 찍고 참 재미나게 살았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여유를 가지고 살았던 그때를 이야기하면 내 눈에선 지금도 빛이 난다고들 한다. 그런 제주도에서 3년을 채 살지 못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월급날이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 비슷한 연배의 원장은 월급을 주면서 한 번도 빼지 않고 나를 포함한 직원들에게 "내가 먹여 살린다."라고 거들먹거렸다.
정작 몇 명 되지도 않은 수강생을 늘리고 지를 먹여 살린 게 누군데!
월급날은 돼먹지 않은 원장의 거들먹에, 신세한탄으로 안주 삼아 술 퍼마시다 다들 속이 뒤집히는 날이었다. 제주도의 푸른 밤은 여전히 그립다. 다른 사람 다 참는데 왜 나만 못 참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다. 그래도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딸이 있는 가장인데.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 자격을 위해 2주일간의 연수를 받아야 했다. 한데 원장은 그건 개인적인 자격 취득이니까 자리를 비우려면 퇴사를 했다가 다시 재입사를 요구했다. 물론 내가 자격 취득하면 더 많은 국비 교육 과정을 할 수 있으니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원장의 말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퇴사를 했다. 2주 동안 자격 취득을 하고 다시 제주도로 내려왔다. 마음 같아선 확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바다를 건넌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에는 디자인 학원이 딱 두 곳이었던지라 이직은 생각할 수 없었다. 회사 말아먹고 빈 몸으로 제주도에 내려와 다시 시작하는 주제에 뭘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난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다시 "정선생, 내가 먹여 살리는 거 알지?"라는 소리를 들으며 다닐 수밖에. 더럽고 치사해도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웃는 얼굴로 또 한 달을 사는 수밖에.
그렇게 또 몇 달을 더 다녔다. 시퍼런 하늘에 떠있는 라퓨타 구름과 바다를 보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살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교사 연수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강사에게 연락이 왔다.
"쌤, 안산으로 올 생각 없어요?"
신학기에 새로 과정을 개설할 예정인데 생각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2년 8월 개월만에 다시 이민을 고민하게 됐다.
2007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