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은 언제나 달콤 쌉싸름하다
1. 달콤.
아침 8시. 눈을 뜬다.
문 밖,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동안 혼자 있다고 불안했던 건 아닌데 왜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아닌가? 안정인가?
5월. 아내는 육지의 삶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한쪽에는 풀지 못한 이삿짐이 조금 쌓여 있고, 건너 방에서는 딸아이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맞다. 이건 안정이다. 안심이 아닌 안정.
아내가 차려준 간단한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5월인데도 덥다고 느껴질 정도의 따뜻함. 그 따뜻함을 적당히 식혀줄 세찬 바람. 제주도 봄바람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거대한 물탱크 통도 둥둥 떠다니게 만든다. 나는 봤다. 노란색의 거대 물탱크 통을.
제주도 5월의 아침을 맞은 적이 있는가?
도무지 칼라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의 다채로운 파랑을 보여준다. 게다가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는 거대한 라퓨타 구름*을 마주하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난다. 아침부터 쨍하지만 차창을 내리면 시원 짭짜름한 해풍이 얼굴을 감싼다. 그야말로 내달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댈 정도다.
시동을 걸고 집을 나와 일주도로를 타고 달린다. 외도에서 5분이면 제주민속오일장 앞 신호에 도착한다. 이때는 재빨리 주변을 살펴야 한다. 대부분 신호가 바뀌는 타이밍이지만 간혹 빨간 신호일 때가 있다. 여기서 신호가 걸리면 줄줄이 연착된다.
갈까? 말까? 내적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그냥 선을 넘는다.
어차피 갈 거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 오일장 앞에서 멈추지 않으면 광양 사거리에 있는 학원까지 15분이면 족하다. 오일장에서 멈추면 20분이 훌쩍 넘는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고작 5분 10분을 빨리 가는 거였지만 나름 스릴이 있어 종종 그런 짓을 했다.
그나저나 입구에서 팔던 바삭하고 납작하고 달콤한 납작 호떡은 잊을 수 없다. 흑설탕이 적당히 녹아 달콤하던, 아내도 좋아해 호떡을 사기 위해 장이 파할세라 퇴근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아직도 달콤함을 자랑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제주도의 새로운 시작은 달콤함이었다.
2. 쌉싸름 혹은 달콤.
처음 해보는 일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강사라는 직업은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긴장감 같은,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 동시에 다발적으로 몰려들었다. 그 기분이란 한 단어로 정리 하기 꽤나 어려운 감정이다. 2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낯설다.
무심히 툭툭 내뱉는 여자 수강생들 사이에 특히 '싸우자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말투를 구사하는 여인네가 있었다. 무심히 '육지 것들'이란 표현을 하기도 하는. 그녀의 말투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 바빴다.
사방이 바다뿐인 곳에서 먹고살기 위해 배를 타야 했던 남자들의 생존과 부재는 그들을 귀한 대접을 하게 만들었고 때문에 제주도에서 여성의 삶이란 거친 생존을 의미했다고. 그런 삶 속에서 그녀들은 무뚝뚝하거나 혹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던 탓에 억척스러운 생활력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야기에 먹먹하면서 공감이 됐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 수업을 들었던 '지사장'은 분명 그랬다.
"쌤! 차 키 좀 줘바요."라며 다짜고짜 수업 중인 교실문을 벌컥 열고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차 키를 내놓으라던 지사장은 차 트렁크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귤 박스로 가득 채워 놓곤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겉은 무뚝뚝 하지만 속은 누구보다 말랑말랑하던 그녀의 얼굴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3년의 제주살이 중 잊히질 않는 사람 중 한 명이다.
3. 쌉싸름.
경험 쌓인 강사에게 일상이란 그저 똑같은 매일의 반복이 아닐까. 어쩌면 강사라기보다 나여서 그렇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강사는 분명 코피 터지게 열심일 것이다.
동트면 출근하고 별 뜨면 퇴근하는 일상. 하루 10시간의 강의가 한 과정을 지났다. 한 과정이 별 탈 없이 무난하게 마무리된다는 건 쓸만한 수업 예제와 그럴싸한 포트폴리오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고로 다음 과정부터는 루틴처럼 비슷하게 돌리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목에 핏대 세우고 늘 새로운 것처럼 열강만 하면 된다.
밤 10시.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강의만 하다 끝난다. 어떤 날은 보강까지 하느라 점심 먹는 시간도 줄여야 할 때도 있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여유로운 아줌마 수강생들이 일찍도 너무 일찍 들이닥치면 모두 바빠진다. 그냥 커피라도 마시며 기다리게 하면 될 것을 원장이 밥 먹는 내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면 밥알이 입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을 들어 가는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흡입하고 강의실로 달려가야 한다.
24시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학원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다. 아무리 수다를 좋아하는 나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떠드는 건 힘에 부친다. 반복되는 일상이 점점 무료함이 되고 과정들이 끝나고 시작되고를 반복할 때마다 새로운 관계는 점점 늘어만 간다.
관계는 늘 새롭지만 그렇다고 피로도는 새로워지지도 않는다.
확실히 먹고산다는 건 어디에서나 쌉싸름한 일일지 모른다.
4. 다시 달콤.
제주도는 도심이래 봤자 넓지 않다. 불야성도 아니다. 연동, 탑동, 광양사거리 같은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온통 어둠뿐이다. 2006년의 제주도는 그랬다. 밤 10시에 차가 막힌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얼마 전에 다녀온 제주도의 광양사거리는 차량 정체로 후미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슬펐다. 제주도의 여유로움은 이제 끝났다.
퇴근길. 어둠 속에서 신호등은 점멸하고 있다. 빨리 건너 달라는 신호처럼. 이미 기능을 잃어버린 신호등을 지나치며 10분을 내달리면 집이다. 그 점멸의 시간을 달리는 동안 나는 충전된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아내와 나는 집 앞 방파제로 간다.
가로등은 어둠을 밝힌다기보다 어둡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점처럼 보인달까. 어둠을 밝혀야 하는 임무를 지닌 가로등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5월의 따뜻한 해풍을 맞으며 아내와 나눠 마시는 캔맥주 하나는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나오는 거대한 적란운은 본 이후 나는 희고 거대한 적란운을 만나면 그렇게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