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떡 같은 인생, 찰떡같이 만드는 비법 5

년세, 고사리 장마 그리고 메디 폼

by 암시랑

생소한 강사라는 직업. 그동안 배우기만 해 봤지 누군갈 가르쳐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마음 졸이는 일이다. 가뜩이나 습자지 같은 지식이 들통날까 싶어 걱정으로 수업 예제와 시뮬레이션으로 밤을 지새웠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사실은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흥분되는 사건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쳐 본 일이 있는가? 없으면 말을 하지 마라.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폭삭 늙었다. 이런 일상을 7년이 넘게 했다. 그중 제주에서 3년을 보냈다.




#1

2006년 3월. 푸른 파도가 넘실대야 할 제주도는 늘 흐리고 자주 비가 왔다. '고사리 장마'라는 계절부터 배우면서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습하고 비가 자주 오는 기후에서 고사리가 쑥쑥 자란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대신 나는 우울감이 쑥쑥 자랐다.


일주 일이 지났다. 집이 있어야 마음 편히 짐을 풀 텐데 원장은 말했던 집을 내놓지 않았다. 제주도는 전세가 아니라 년세라서 도중에 집을 빼면 나머지를 돌려받지 못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면서 '좋은 집'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집'은커녕 '그렇고 그런 집'이라도 애초에 찾을 집이 있기나 했을까 싶었다. 사실 그때도 그런 생각이 비슷하게 들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내가 끌려온 이유가 집이었으니 기다렸다. 어서 빨리 짐을 풀고 싶었다.


#2

제주도에 처형의 지인 집이 비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작지만 심지어 아파트였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머물렀다. 내 집이 아니라는 건 여전히 짐을 풀지 못하게 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언제든지 떠나야 할 것 같은 이곳은 편한 곳이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엔 매일 낯설고 피곤한 공기가 훅하고 밀려들었다.


원장이 약속했던 '좋은 집'은 결국 없었다. '그렇고 그런 집'도. 아무것도. 원장의 구차한 변명은 자신이 말한 '집'의 정체는 연봉에 포함된 이야기였다고 발뺌을 했다. 일주일 동안 대책을 마련했다는 말이 고작 발뺌이라니.


어이가 없어진 내 무표정한 표정에 원장의 눈은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집'을 내놓을 태세는 아니었다. '그래서'라는 표정이 되니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무책임한 놈 같으니.


#3

고사리 장마는 계속이었고 결국 집은 생기지 않았고 나는 비어있는 처형의 지인 집에 혼자 살지 않고 머물고 있다. 더 머물러야 할지 말지 고사리 장마 끝을 볼지 말지 고민이 들었다. 전화다. 아내는 귀신이다. 왜 울컥하는지 모르게 울컥해버렸다. 지금 내려오면 안 되는데. 얼굴에 메디 폼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데.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갈팡질팡거렸다.


좋은 집도 그렇고 그런 집도 생기지 않았는데 주말은 생겼다. 제주도에서 맞는 첫 주말. 그것도 나 혼자. 여전히 흐리고 비가 내린다. 갈 곳은 약국 밖에 없다. 메디 폼을 덕지덕지 붙이지 않았더라도 우울감이 쑥쑥 자라는 중이어서 그다지 어디라도 가고 싶진 않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앞으로도 집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달이 됐든 얼마가 됐든. 아내는 당장 올라오라고 했다. 뭐 그런 개 같은 상황인데 거기에 있느냐고.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메디 폼을 얼굴에 도배를 해놔서 그럴 수도 없다. 그냥 한 달 월급은 받고 올라가겠다고 얼렁뚱땅 넘겼다.


#4

고사리 장마 기간에도 틈틈이 빛나는 제주 바다는 눈에 띄었다. 그리고 4월이 가까워 올수록 유채꽃은 흐드러졌다. 세상은 노란색 아니면 노란색이 아닌 색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을 봐도 풀과 구분하지 않는 나도 노란색에 빠져 들었다.


아내가 못 참고 내려왔다. 5살 딸과 딸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보랏빛으로 변할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니 걱정이 돼서 밤새 잠을 설쳤다.


"여보, 나 있잖아. 좀 다쳤어."

"어? 언제? 어딜?"

"응 좀 됐는데, 잘 안 낫네. 얼굴."

"어쩌다가? 많이 다쳤어?"

"아니 조금. 내일 놀랄까 봐."


공항에서 마주친 아내는 그 자리에 서서 펑펑 울었다. 딸은 오랜만에 보는 아빠를 피해 엄마 뒤로 숨었다. 아내는 펑펑 우는 와중에 아빠를 피하는 딸아이의 등을 떠민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딸아이는 엄마 아빠 눈치를 보고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고 그런 아내는 창밖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한숨만 쉬었다. 고사리 장마였고 비가 내렸고 차 안은 침묵만 흘렀다.


#5

아침부터 아내는 분주했다. 처형과 통화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샌가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었고 다시 나도 아내도 잘 모르는 사람들과 통화를 했다. 비는 멈췄지만 햇볕은 따뜻하지 않았다.


딸아이는 어제보다 낯을 좀 덜 가렸다. 메디 폼 사이로 진물이 새는 걸 보니 끈끈이가 생명을 다했다. 전화 통화를 끝낸 아내가 휴지로 진물을 닦아내며 눈물을 그렁하게 보인다. 짜증 섞인 말투로 약국의 위치를 묻는다. 얇다. 침대 시트만큼 두툼해서 여간 불편했던 메디 폼이 아닌 얇은 습윤 시트로 갈아 주며 묻는다.


"계속할 거야?"

"어?"

"강의 계속할 거냐고"

"재미있어. 원장은 재섭 지만"

"알았어. 집 좀 알아보려고"


#6

아내는 일주일 동안 참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제주도에 발품을 판다는 건 자차가 없으면 참 피곤한 일인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도, 하귀, 일도, 이도, 용담, 봉담, 사라, 화북까지 여기저기 말 품에 발품을 팔며 좋은 집이 아닌 우리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렇게 보러 다닌 집을 나와 다시 보러 갔지만 그 집들은 결국 우리 집이 되진 못했다. 아내는 열흘이 지나고 딸과 원래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거기도 우리 집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이미 내가 날려 버렸으니까.


다시 부모 님 집으로 돌아 간 아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했다. 시트는 제대로 잘 붙이고 있느냐, 밥은 제때 먹느냐를 비롯 어디 어디로 가서 집을 보고 오라는 집 구경이었다. 아직은 어디에도 우리 집은 없었다.


다시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은행 일과 급한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오겠다던 아내는 정말 2주도 안 돼서 다시 내려왔다. 부모님을 설득하고 아주 이민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우리 집을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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