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

[에세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by 암시랑

읽고 싶던 책이었다. '갑질의 신세계를 보았다.'라던 작가의 대놓고 직설적인 문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던 출판사 에디터의 글을 보고 궁금증에 입이 바싹 마를 정도였다. 그러다 우연히 작가 강연회에 참석하게 되어 싸인 좀 받을 요량으로 구입했는데 정작 사인은 받지 못했다.


표지에 거울 속 '나'가 들여다보는 '꽃'이라는 존재에 대한 특징화된 여성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가볍지 않았다.


아무튼 도대체 어떤 방법이 있을지, 안하무인인 또라이들이 난무하고 나이 들었다는 게 권력인 도처에 널린 인간들의 개소리에 어떻게 단호하고 적절히 넘길 수 있는지 궁금했다.


프롤로그를 읽는 것만으로 책 한 권 다 읽은 것처럼 작가의 그동안 맺힌 감정들이 팍 꽂힌다. 그러다 '그런 무례한 인간이 나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스물거리며 올라와서 당황스러웠다.

'당당함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 이란 전제적 표현의 의미를 작가는 여성의 문제로 적어내고 있지만 난 장애의 문제로 읽혔다.


대한민국 대중(大衆)이라면 당연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할 대중교통을 퇴근 시간에 타려 했다는 이유로 "장애인이 왜 퇴근 시간에 버스를 타려고 난리냐"라며 모멸감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운전기사를 비롯 여러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아야 했던데는 장애인은 세금이나 축내면서 놀고먹으면서 그냥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지 가뜩이나 콩나물시루인 버스를 퇴근 시간에 타려고 난리냐는 질타성 언동이 담겨 있다.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아니다.


많은 장애인도 신성한 노동을 제공하고 세금을 내며 여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당연히 일을 하니 퇴근을 하는 것이고 퇴근을 하니 퇴근 시간에 당연히 대중교통을 타고 싶은 거다. 장애인도 대중이므로.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이 하고 있는 노동의 가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원 버스에 휠체어가 끼여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을까?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장애인은 당연한 것을 당당하게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민폐나 양아치로 보이지 않을까. 이런 당연한 것조차 당당히 요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입장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나 있을까.


작가가 언급한 밴스의 말 중에 "노력의 부족이 능력의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라는 문장에서 어릴 때 자주 듣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넌 왜 그 모양이니"라거나 "네가 그러면 그렇지" 혹은 동네 아줌마들에게 나를 칭찬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애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요. 호호호"라는 말도 서슴없이 하셨다.


엄마는 내가 정말 머리는 좋은 아이라고 믿었을까? 난 삼 형제 중 첫째였다. 맏이라는 기대감에 난 적성에도 맞지 않은 공부를 잘해야 했는데 그건 정말 쉽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도무지 공부는 집중하기 어려웠다.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빠져들어 배가 고픈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공부는 단 1시간을 앉아 있는 건 점점 더 머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운동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참 빼어나게 잘 했는데 왜 맏이라는 이유로 그 잘하는 걸 못하게 막았을까 싶다. 그때 좋아하던 운동을 제대로 했었더라면 인생이 좀 달리 졌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엄마의 엄마나 아빠,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쓰잘데기 없는 가시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가시네는 하물며 공부를 잘했지만 오빠와 남동생들이 다 대학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감지 덕지였다. 그런 시대였다.


전후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여서 그랬을까? 남자 아닌 여자는 그렇게 쓰잘데기 없다고 여겨지는 건?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런 시대에 나고 자란 엄마에게 '공부'란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한 한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너희들은 하라고 해도 안 하냐"라며 그 한을 대를 이어 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성별로 인한 차별은 숫자의 차이일 뿐, 겪고 있는 사람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매한가지다. 숫자가 적다고 남성 역시 차별을 받지 않은 존재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앞으로 그런 시대가 아니길 바랄 뿐.


"별 쓸모가 없는데도 살아 있으니 더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p86


정말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닌가. 쓸모로 사람이 재단되는 이 사회에서 쓸모없음으로 존재의 가치를 높여주는 작가의 필력이 부럽다.

"공감이란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 보고, 그 사람의 느낌과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 p99


나는 솔직히 이 책이 무례한 사람들에게 "이런 시베리안허스키 같은 스키" 정도의 사이다 같은 직설 화법까지는 아니라도 김숙처럼 자존감을 지키며 무례를 넘기지 않고 은근히 까줄 수 있는 방법들이 처음부터 꽉꽉 채워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세상에는 어마어마한 또라이들이나 안하무인이거나 갑질이 일상인 인간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인간들에 대한 대처법이라기 보다 물구나무 서야 할 정도로 바닥에 꽂혀 있는 자존감을 지켜내거나 끌어올리는 방법이 많은 부분으로 채워져 있다. 살짝 아쉽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언젠가 써먹고 말리라'라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비법도 많다.


또 여성이 중심에 있는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작가가 제시하는 '문제'들, 그러니까 성희롱이나 성폭력 문제,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사회문제가 되는 데는 사실 사회적 '인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작가가 경험했다고 고백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성희롱 문제 역시 개인이 경험한 '사건'에서 그쳤지만 성장하면서 그 일은 줄기차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순간순간 치밀어 올라 '문제'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사한 문제들이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여론을 만들면서 더 이상 그런 문제는 대 다수 대중의 인식되고 사회문제가 되는 것이다. 82년 생 김지영이 끊임없이 곱 씹히는 이유다.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미투 운동이 개인의 고백이나 고발이 되지 않은 이유 역시 개인의 사건이 사회문제로 인식되어 해결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노인이든 노숙자든 다문화든 청소년이든 모든 소수자의 문제는 사회 문제라는 여지를 남긴다.

"우리는 관계하는 타인들에게 영향을 받고, 그의 일부가 나의 일부가 된 후, 작별하고, 이를 통해 성장한다." p238


참, 관계란 특히 경험 부족한 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도적 관계를 이끈다는 것은 관계 맺기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참 어렵다. 나 역시 관계의 피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있는 관계도 챙기는데 소극적이고 게을러진 탓에 새로운 관계는 아예 피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젠 마주 보고 대화는 고사하고 전화로 통화하는 것에도 피로도를 느낀다.


선을 타고 넘나드는 목소리에 신경을 쓰고 감정이나 맥락을 읽으려 애쓰는 모습들을 느낄 때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민다. 그래서 이제는 목소리가 아니라 활자가 더 편하다. 감정이 실리지 않는 텍스트는 오해를 만들 소지가 높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어차피 통화하면서 보이지도 않은 상대방의 표정을 읽으려 애쓰다 만들어지는 오해 역시 만만치 않다.


이러나저러나 피곤하기 매한가지라면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그저 활자가 편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이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사이다스럽지 않은 건 확실하지만 무례한 인간들에 대한 구분과 대처는 적당히 할 수 있다. 연습이 필요는 하겠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설] 오리 이름 정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