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굶주린 늑대는 사고를 친다”

시즌 ⌜4⌟ 모두 아름 다 왔다

by 아문선

아우님들은 한국의 미래입니다. 그대들이 건강히 열심히 한국인의 명예를 지키면 한국의 미례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밀물 |1978년 11월호 |중동에 나가 있는 아우들에게 |유안진 |단국대학교수-



천사님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든다

불행하게도, 굶주린 늑대의 첫 만남은 항공기 여승무원이다. 여성에 대한 단계별 적응기를 거치지 않고, 미모와 지성을 뽐내는 우리의 날개 여승무원인 것이다. 항공기 탑승을 환영하며 건네는 스튜어디스의 표준형 미소, 예의 바른 몸짓과 손짓, 그리고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허기진 노동자의 눈에는 그녀들이 천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여 승무원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분들은, 여승무원의 옅은 화장품 남새와 스치는 눈 맞춤으로 반쯤 넋을 사막에 두고 온 표정이다. 이륙준비를 하는 동안, 굶주린 남정네들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레이저 시선으로 여승무원의 얼굴은 반쯤 타버렸고, 남은 절반도 곧 연기로 사라질 듯하다.


천상의 기내 서비스

출국때와는 다르게, 귀국행 비행 편은 전세기로, 다하란에서 김포공항까지 14시간을 직항으로 날아가는 긴 여정이다. 용접공 최 씨는 진녹색 라이방을 쓰고 벗질 않는다. 기적처럼 만들어낸 가슴에 털을 드러내듯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젖히고, 금테가 선명한 양담배를 꺼내 손끝으로 툭툭 두드린다. 손을 번쩍 들고 언제쯤 담배를 피울 수 있냐고 묻기도 한다.


드디어 이륙이다. 기장의 친절한 환영 멘트가 흘러나오고, 기다리던 승무원들의 기내 서비스가 시작된다.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은 고고한 자태의 여승무원들이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음료와 가벼운 주류를 권한다. 이어 기내식이 제공되고, 와인과 양주도 따라준다.


"아가씨~ 여기 양주 한잔 더 주이소"

역시 용감한 용접공 최 씨가 앞서나간다.

"와인은 너무 심심허당게, 쎈놈으로 주어뿌러."

최 씨의 라이벌 비계공 김 씨도 빠지지 않는다.


웰컴 기내식을 마치고 나니 끽연 시간이다. 일제히 양담배를 꼬나물고는 세상 편한 표정을 짓는다. 200여 명의 노동자가 뿜어내는 담배 열기로 비행기가 날아갈 것 같다. 그런 소동이 두어 번 지나고, 한숨 자고 나면 기장의 친절한 기내 방송이 다시 흘러나온다.

"근로자 여러분, 여러분의 고국 제주도 영공을 지나고 있습니다."

와~ 하는 함성으로 일제히 보이지도 않는 고향땅을 찾아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아재~ 부산 보이나?"

"택도 없당께. 여그 목포 지났어라."


사막에도 없다•바다에도 없다

대부분의 현장은 물론이거니와 휴일에 라히마나 담맘 시내를 간다 해도, 남자만 있다. 그것도 가난한 유럽인, 인도인, 필리핀인, 아프리카인, 한국인 등이다. 상점 주인은 사우디 현지인이다.


여자는 상점에도 없다.

여자는 공원에도 없다.

여자는 사막에도 없다.

여자는 바다에도 없다.


사우디의 거리를 걷다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넘쳐나 남녀 성비가 남성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아랍 여인 특유의 긴 속눈썹, 호수처럼 깊은 눈, 백옥처럼 흰 얼굴, 오뚝한 콧날을 갖춘 미모가 혹여 중동 건설 노동자의 눈길이라도 스칠까, 집 안에서는 아버지와 오빠가, 집 밖에서는 종교 경찰이 이중삼중으로 지켜 선다. 여성은 남자 후견인 없이 다니다가는 종교 경찰에게 호되게 매를 맞을 수도 있다. 단순한 외출이나 외식, 쇼핑조차 예외가 아니다.


어느 날, 여자만 나타나면 버스 창문 쪽으로 목을 쑥 빼는 한국 노동자가 안 쓰러 보였나 보다. 골목에 서성거리는 십 대 남자아이가 검은 부르까|Burqah|를 둘러쓰고, 출퇴근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는 배려를 보여 주기도 한다. 얄미움보다 메롱~ 하는 표정이 귀엽기는 하다.


사막에 등장한 백의의 천사

리야드의 주택 건설사업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다. 한국인 근로자가 길을 가던 여성에게 손을 한번 흔든 적이 있다. 그렇게 소양교육, 현장교육을 받았건만, 반가움에 그만 손을 한번 흔든 것이다. 이슬람교 중앙연합회 파견된 무슬림 유학생의 중재로 노동자의 처벌은 피했지만, 이 업체의 중장비 사용 허가 기간이 1년에서 1개월로 단축되는 처벌을 받았단다.


리야드 국립병원에는 1980년대 초부터 한국인 여성 간호사들이 취업하기 시작했다. 리야드 인근 현장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근로자 환자들은 이 병원을 특히 선호했다고 한다. 환자는 당연히 치료를 받으러 가지만, 멀쩡한 건설 노동자들조차 휴일이면 병문안을 핑계 삼아 회사에 병원행 버스를 준비해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명목은 동료의 문병이었지만, 실은 한국인 간호사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한 기대가 더 컸던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일상은 남자만 일하고, 남자만 쇼핑하고, 물담배를 피우는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전신을 검은 부르까|Burqah|로 감싸고, 눈마저 니캅|Niqab|으로 가린 무섭기도 한 여인을 마주하기보다는, 외로운 늑대로 살아가는 편이 슬기로운 중동 건설노동자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굶주린 늑대는 사고를 친다

서울 출신 공고생 "동철"이가 귀국할 무렵이다. 가족 사진첩을 보고 있는 도장공 박형님을 슬쩍슬쩍 곁눈질로 바라보던 "동철"이는 갑자기 친근 모드로 전환한다. 사진첩 속에는 미모의 처제가 언니와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다. 한 달 동안 공들인 그의 노력 덕분에, "도장공 박형님"은 "동철"이에게 처제와 가족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긴다. 일 년을 굶주린 늑대는 미인 분별력이 확연히 떨어지는 현상을 조심해야 하는데.....


한 달이 지나 현장에 복귀한 뒤, 처제의 편지는 형부가 아닌 "동철"에게 배달된다. 아, 굶주린 늑대는 날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첫 만남에 운명이라 믿고, 그날 만리장성을 쌓았건만—이게 웬일인가. 처제가 보내온 편지 속, 동봉된 사진들을 보는 순간, "동철"이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그 여자가 이 여자일까, 이 여자가 그 여자였던가…"

박 형은 매일같이 닦달하고 있다.

“우리 처제 책임져!”


공고생 아기 아빠도 있다. 첫 휴가에 찐한 연애를 했는데 그만 임신이 되고, 아기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 된 용산공고 출신 용접공 "준수"는 21살의 아기 아빠가 되어, 오늘도 우유값 마련을 위해 연장근무를 신청한다. 그러고 보니, 20대 초반이라기엔 폭삭 늙어버린 그의 얼굴을 보니—아기 아빠가 맞긴 맞다. 지금쯤 그의 아들이거나 딸의 나이도 오십 줄일 것 같은 놀라움이다. 이 나이에 손녀들 챙기는 게 힘들 땐 "준수"가 생각난다. 어쩌면 그는 증손자를 챙기고 있겠다.


사뿐사뿐 스텝을 밟던 최 씨 아저씨는 뜻을 이루었을까? 알 박기에 성공한 정 씨는 형수씨로부터 이쁨 가득 받고 있을까? 인천에서 오신 전설의 카사노바 형님은 형수에 발목 잡혀, 한국에 눌러 않았을까? 동철이는 책임지고 박 형님과 동서가 되었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굶주린 늑대에게 들려오는 알라의 가르침이 있으니, "귀국 후 한 달 이내는 절대 사고 치지 말지어다"




참고 문헌 및 인용 관련 정보는 머리글에 게시하였습니다.

◧이글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 초에서 1980년 중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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