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철도 전문가의 필리핀 마닐라 에피소드
아 ~ 나의 직장 명운도 끝이구나
H 상사 마닐라 지사장으로부터 이른 아침 e-메일을 받았다. 통상 주고받는 메일이라 가볍게 클릭한다. “큰일입니다. 필리핀 교통부로부터 마닐라 MRT 3호선 |계약 해지 공문|이 송달되었고, 현장사무소도 급히 철수해야겠습니다."
7천여 개의 군도로 이루어진 필리핀에서는 철도는 유용한 교통 시스템은 아니다. 루손섬*에 있는 479km의 일반철도와 메트로 마닐라*에 있는 3개 노선의 경전철 시스템이 전부이다. LRT 1과 LRT 2는 교통부 산하의 설비이고, MRT 3로 부르는 LRT 3는 필리핀 최대 재벌 AYALA 그룹이 1999년 BLT(Build-Lease-Transfer) 방식으로 건설 후 필리핀 교통부(DOTr)가 운영하는 노선이다.
*루손섬: 메트로 마닐라가 위치한 필리핀 최대의 섬
*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행정수도를 포함 총 주변 16개 도시를 묶어 칭함.
마닐라 MRT 3는 남쪽 종점인 TAFT AVENUE에서 북쪽 종점인 NORTH AVENUE까지 13개 역 16.9km이다. 메트로 마닐라 남북 관통로(EDSA)를 따라 CALOOCAN, QUEZON, SAN JUAN, MANDALUYONG, MAKATI 그리고 PASAY를 연결한다. 일일 탑승 인원은 60만 명으로 설계 탑승객수 보다 2배가 많다. 온종일 길게 늘어선 대기 행렬은 일상이고, 출퇴근 언저리에는 탑승을 포기해야 하기도 한다.
사업예산에 턱도 없는 금액이라 사업은 흐지부지되었다.
이번 사업은 대전에서 해군 군수물자 무역업을 하는 정 사장의 소개로 시작하였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의 그는 해군 대위 출신의 사업가이다. 경력과 달리 잘 웃고 대전에서 올 때마다 번번이 성심당 튀김 소보르를 내미는 자상함이 있다. 그와 필리핀해군장교 출신의 BUCAYAN 교통부 차관은 친구 사이다. 간단한 사업 소개를 받고 2015년 3월 필리핀 교통부를 방문하였다. 잦은 고장과 유지보수 SPARE PART가 없어 열차 제어 설비를 전면 교체할 계획이며, 또한 탑승 수송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추가 중국 대련 차량을 48량을 도입한다는 BUCAYAN 차관의 설명이다. 현장 조사 및 MRT 3 기술 이사 Mr. YUSUF 면담 후 예가 산정을 하였으나 사업예산에 턱도 없는 금액이라 사업은 흐지부지되었다.
잊힐 만한 시점에 H 상사로부터 한국 B 메트로와 필리핀 3개 업체가 JOINT VENTURE를 설립 (BR J/V라 칭함) 입찰 준비 중이고, 열차제어 시스템 공급사로 참여해 달라는 내용이다. 계약 조항 및 JV 간의 갈등을 간신히 봉합하고, BR J/V는 기존 사업자인 일본 SUMITOMO 컨소시엄, 독일 함부르크 컨소시엄과 국제 경쟁 입찰을 거처 낙찰을 받았다.
정권이 바뀐다.
계약 후 1년쯤 필리핀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가 압도적 지지로 당선이 된다. 철도사업과 밀접한 관계인 교통부 장관, 차관 및 MRT 3 사장 등 주요 인사가 교체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문제없다는 BR JV 프로젝트 매니저 Mr. EURGIN은 여유로웠다. 그의 호언 과는 달리 교통부로부터 열차 고장과 운행 지연을 사유로 클레임 이 빈번 해진다. 심심치 않게 언론 매체에서도 분쟁이 기사화된다.
17년 11월 6일 0시 영업시간 종료와 동시에 필리핀 교통부 |운영 인수팀|이 들이닥치고, 모든 BR JV 관계자는 퇴실을 명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BR J/V도 관할지인 케존시(Quezon) 지방법원에 계약 해지 가처분 신청과 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한다. 가처분 인용이나 적정한 보상을 포함한 중재를 기대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필리핀 교통부(DOTr)는 다음 해 5월 일본 경제협력 자금을 활용 SUMITOMO-MHI JV와 수의 계약(隨意契約)*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수의계약: 공개 입찰이나 경쟁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체결하는 계약
BR J/V 주간사인 B 메트로는 J/V AGREEMENT에 따라 모든 계약이행 관련 면책이라 면담을 회피하고, 필리핀 3개 투자사는 연락 두절이다. BR J/V의 하도급 업체로 제품 생산 및 고객 공장 검수까지 마쳤다. BR J/V의 신용장* 개설과 선적 일자 확정만 기다리고 있던 터라, 손실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신용장( Letter of Credit ) : 수출입 거래에서 은행이 약정된 금액 지급을 보증하는 위탁서
우선 협력사 그리고 완제품 공급 업체에 반품 가능성을 타진한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의 협조로 교통부 면담을 하고 열차 제어시스템 분리 직계약을 추진한다. BR J/V 자산 및 채권에 대한 가압류 또는 필리핀 3개 투자사에 대한 손해 배상도 현지 변호사와 검토한다. 신규 계약자인 SUMITOMO 마닐라 지점 방문하여 열차 제어시스템 하도급을 제안한다. 이란 테헤란 메트로, 사우디 담맘 철도 등 대체 사업도 발굴한다. 백방으로 묘책을 찾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법원의 계약 해지 가처분 인용이나 손해 배상 청구는 아득히 멀고, 기 투입 원가의 손실 처리 그리고 매출 취소라는 최악의 선택으로 서둘러 봉합된다.
해외 수주 사업은 예측 불가한 위험 요소가 많다.
국가 리스크, 계약 독소조항, 발주처 평판, 기술 난이도, 원가 변동성, 현지화 환율 안정성 그리고 세무 회계까지도 쉽게 넘어갈 수가 없다. 분야별 위험 요소를 찾아내고 HEDGE 가능 여부를 검증한다. 대형 프로젝트 경우 입찰 전 ITB(Invitation to Bidder) WORKSHOP을 실시된다. PMO(Project Management Office), 기술 부서, 재경부서 및 법무팀이 전문 분야별 약 150여 개의 CHECK LIST가 만들어진다. 이에 대한 리스크를 분석하고 위험 회피 방안과 관련 비용을 산정하기 위함이다.
영업과 제안조직으로 구성된 입찰 TFT(Task Force Team)는 ITB WORKSHOP GUIDE에 따라 내부 보고자료와 입찰 제안서를 만든다. 사업 경험이 없는 국가의 경우 현지 법무, 세무 회계법인으로부터 계약에 따른 해당 국가 법령과 세무회계 전반에 따른 자문이 필요하다. 입찰 마감 2주 전 대표이사를 위원장으로 수주위원회가 개최된다. 이때는 ITB WORKSHOP에서 준비된 RISK REGISTER 요약과 원가 심의를 한다. 또한 입찰 TFT는 수주 전략과 사업 수행 전략을 별도 보고한다. 2~3시간의 치열한 토론을 거처 입찰 참가 승인을 마치면 입찰 보증서(Bid Bond) 발행 절차가 진행된다. 완벽해 보이는 입찰 및 |계약 RISK 검증 프로세스|이다.
다시는 앞서지 않을 것이다.
실패에 따른 |질책과 책임|은 나를 주저앉게 한다. 다시는 앞서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온 긴 세월은 다시금 나에게 속삭인다. “해보긴 해봤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단단함으로 두근거리는 내일을 맞으리라.
에필로그 : 마닐라 MRT 3 사업 과제로 설계 및 개발된 시스템은 2022년 한국 최초 무인 운전 열차 제어시스템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