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라히마 캠프”

시즌 ⌜1⌟ 페르시만을 걷다, 라히마 캠프

by 아문선

⌈우리는 자랑을 갖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랑을 남기고 싶습니다⌉

-밀물|1989년 1월 창간호|창간사|박동규|해외건설협회장-



바닷가 작은 마을 "라히마"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지역에 위치한 라히마|Rahaima|는 인구 약 40,000명의 읍 단위 소도시이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을 마주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3대 도시인 담맘|Dammam|과 아람코 본사가 있는 다하란|Daharan|이 30분 거리이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에는 진주조개를 잡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원유 수출기지 라스 타뉴라|Ras Tanura|배후 도시이다.


중동 건설 노동자로 지낸 7년 중 4년을 라히마에서 보냈으니,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제2의 고향인 셈이다.

D산업은 오일 관련 플랜트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특성상, 주요 프로젝트 대부분이 유전지대 및 수출 거점인 라스 타뉴라|Ras Tanura|, 주베일|Jubail|, 쥬하이마|Juhaima|, 우쓰마니아|Uthmania|등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D산업의 사우디 지역 본부는 라히마에 위치해 있으며, 다하란 공항에서도 1시간 이내 거리로 입출국자의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인근 도시인 담맘과 알코바에는 쇼핑몰이 많아, 귀국 준비를 위한 카메라나 전자제품 등을 구하기에도 수월하다.


강남과 강북

라히마 캠프에는 라스타뉴라|Ras Tanura| 원유 수출 터미널 유지보수|M/T¨|현장, 라스타뉴라 486 정유공장 건설현장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숙소이다. 전체 캠프는 총 30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동은 8인용 숙소 4실로 이루어진 간이 건물이다. 정직원 전용 숙소는 별도의 구역에 배치되어 있으며, 1인실 및 2인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지역본부가 위치해 있어, 타 현장 배치를 위한 대기 공간으로 활용되는 임시 숙소 2개 동이 마련되어 있다.

¨M/T: Maintance 줄임말로, 노후화 또는 고장 난 원유 송유관 및 시설을 보수하는 작업


라히마 캠프 건물들은 시멘트 벽돌로 벽체를 구성하고, 지붕은 아연도금 주름 강판이다. 바닥은 시멘트 마감을 하고, 녹색 페인트를 칠해 그나마 정갈한 느낌을 준다. 유리 창문이 건물 정면으로 2개가 있지만 채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정식이다. 캠프는 라히마 시내로 연결되는 중앙 도로를 기준으로 A구역과 B구역으로 나뉘며, 각 구역은 15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히마 캠프를 경험한 이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A구역, 이른바 "강남지역"으로 불리는 곳이 더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A구역이 "강남지역"으로 불리는 이유는 먹고사는 문제이다. 캠프 내 모든 인원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이 A구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용하는 구내식당 옆 칸에는 정직원 전용 식당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노동자 식당과 정직원 식당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직원 식당은 배식 방식이 아닌 뷔페식으로 운영된다. 둘째, 직원 식당은 식탁보가 깔린 2~4인용 테이블과 개별 의자가 갖춰져 있어, 보다 쾌적한 분위기를 제공한다.


반면, 노동자용 식당은 주방 보조 인력이 직접 배식을 담당한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많은 인원을 빠르게 식사시키기 위한 효율적 운영 방식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고기반찬의 수요를 조절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식탁과 의자는 자체 목공 작업을 통해 제작된 베니어판 식탁과 긴 목재 벤치이다. 노사 문제에 민감한 캠프장은 점심시간마다 식당을 순회하며, 노동자와 정직원 모두에게 동일한 식사 메뉴가 제공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노사끼리 힘 좀 합쳐가꼬, 단디 잘 살아보자 아이가!”는 메시지를 반복하며 캠프장의 존재감을 과시하곤 한다.


강남에는 펩시콜라, 담배, 쵸코렛, 김 빠진 맥주|Non-Alchole|, 과즙음료를 파는 매점이 위치해 노동자에게 편리성을 더한다. B동엔 아쉬운 대로, 의무실, 이발소와 휴일이면 떠들썩한 새마을 회관이 있다. 무엇보다 강남과 강북을 결정짓는 요소는 교통 문제이다. 출퇴근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는데 요긴한 통근버스 정류장이 A 구역에 있다. 식당이 멀고, 출퇴근 버스에서 내려 200미터 정도 걸어 들어가는 B동은 비호감 일수 밖에 없다.


A구역과 B구역에는 별도의 샤워장과 화장실이 동 과 동 건물 사이에 있다. 공용 화장실과 샤워장은 40명 정도 수용 가능한 규모다. 좀 거리가 있는 경우 빤스 바람에 샤워장까지 뛰어야 한다. 2리터 씬너|Thinner|¨ 깡통으로 만든 목욕통에, 비누와 세면도구를 챙기고, 목에다 수건 한정 걸치면 목욕탕 패션이 된다. 완벽한 개방형 샤워장이라, 온 동네에 조 씨, 박 씨, 김 씨 모두의 물건 크기를 소문내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마을 빨래터가 여인네의 유언비어의 진원지였던 것처럼, 자신이 없으면 앞 뒤로 가리거나, 멀리 떨어진 구석에서 다소곳이 샤워를 마쳐야 한다.

¨씬너: 페인트 희석제로 휘발성이 강해, 깡통이 깨끗함


우리 집은 단칸방

발주처인 ARAMCO 또는 원청사인 FLUOR사 및 BECHTEL사가 제공하는 캠프는 4인 1실 또는 3인 1실로 라히마 캠프와는 큰 차이가 있다. 발주처 캠프가 5성급 호텔이라면 라히마 캠프는 3성급이다. D산업이 해당 토지를 임대하여 직접 건축을 진행하였으며, 침대와 옷장 등 비품 또한 자체 제작한 Hand Made이다. 섭섭한 점도 있지만, "우리 집"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며, 한국에서 공수된 식자재를 활용한 식단은 노동자들에게 높은 만족도를 주었다.

¨ FLUOR사/BECHTEL사: 미국계 EPC (설계·조달·시공) 업체, 석유·가스, 화학, 발전소, 광산, 원자력 등


침상 8개가 좌우로 4개씩 배치되며, 개인 사물함이 있다. 귀중품은 본인이 알아서 자~알 관리해야 한다. 옷장 문에는 미희, 정희, 윤희 등 볼륨 있는 여배우들이 미모를 뽐내고, 귀국에 좀 예민한 분들은 빨강 X표로 지워나가는 큼지막한 달력 있다. 귀국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세간살이가 고급스러워진다. SONY, AIWA, JVC 등 일본 브랜드의 카세트 라디오가 등장하고, 곧이어 니콘, 캐논, 미놀타 카메라도 등장한다. 좀 투자한다 하면 당시 유행하던 마란쯔, 파이오니어, 구룬디 등 3단 또는 5단 Hi-Fi 음향 시스템까지 등장한다.


취침 시간은 9시다. 9시면 무조건 소등이다. 다음날 5시면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관계도 있지만 남자끼리 딱히 재미나게 놀만한 일도 없다. 그냥 9시면 소등하고, 그 뒷일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특별히 방장을 뽑지는 않지만, 여럿이 모이면 당연히 위계질서가 정리된다. 목소리가 크고, 성질이 급하신 분이 방장이다. 방청소도 해야 되고, 또 기금을 조금씩 만들어 귀국자 송별 회식도 한다.


가족을 소개합니다
4년이라는 시간을 라히마 캠프에서 보냈다. 타 현장의 캠프도 또렷이 기억되는 시간이지만, 라히마 캠프에서 보낸 찐한 일상이 기억세포 최상위층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종명"이 형이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선한 얼굴과 조용함이 있다. 친형님이 사우디 지역본부 관리과장으로 있어 금수저라 불릴만하다. 당연히 꿀 보직인 캠프 관리직으로 전기시설 담당이다.

다음은 "창대" 형이다. 나이는 28살, 종명이 형과 동갑이다. D산업 훈련원 출신으로 은연중 본인은 건설현장 노동자급 이 아니라는 점을 중요시한다. 캠프 부식 그리고 기타 소모품 구매 담당이다. 그 또한 꿀보직이다.


종명이 형과 창대형 사이에는 30대 중반의 "계장공 서 씨"가 있다. 서울 출신답게 세련된 패션과 말투가 특징이다.

부산 "최 씨 아저씨"는 40대 초반으로 용접공이다. 덩치가 크고 사투리가 억세지만 귀국을 앞두고 춤바람이 났다. 시간만 되면 침상 사이로 하나 둘 셋 찍고 둘둘셋 하얀 빤스와 러닝셔츠 바람에 사뿐사뿐 춤을 춘다.


광명에서 온 기계공 "정 씨 아저씨"는 정치색이 강한 분이다. 어느새 어용 노조 격인 "새마을 위원회¨"에서 활동 중이며, 차기 위원장을 목표로 이 사람 저 사람 친구 만들기 바쁘다. 숙소 내 맞수인 용접공 최 씨는 "사우디 체질 맞다 아이가"라고 정 씨를 놀린다. 또 정 씨는 광명도 서울이라고 계속 우기시는 분이다.

¨새마을 위원회: 노동조합을 대신하는 회사 주도의 노사 협의체

내 옆자리에는 후암동에 산다는 50대 초반의 "김 씨 아저씨"다. 나만한 아들이 있다고 항상 염려해 주는 분이다.


숙소에는 또 한 명의 공고생¨이 있었다. 진주공고 배관공 "성길"이다. 침상 머리맡에 걸어둔 그의 가족사진에는 예쁜 누나와 여고생 여동생이 주인공이다. 누나가 미인이라, 혼기를 앞둔 총각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일 년쯤 지나 누나가 결혼했다는 소식에, 낙담한 총각들은 현길이 매형에게 악담을 쏟아낸다. "짐승 같은 놈"이라나. 성길이 여동생은 결혼했을까? 공고생 보다 3살쯤 어린 여동생에게 자꾸 눈길을 주어도, 성길이는 멋쩍은 웃음으로 "와~ 이리 덥노"라고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공고생: D산업이 전국 8개 공고에 위탁 훈련 후 채용한 건설노동자


잘 계시죠?

50년이 흘렀으니, 모두 노년에 삶을 살고 있거나, 먼 나라로 떠났을 것이다. 변색된 누런 빤스와 넌닝구로 단련된 가족이었으며, 휴일이면 침상을 중심으로 반으로 갈라, 윷놀이를 즐겼던 이웃 들이다. 5 리얄|원화 약 1,850원|패자 분담금에 목소리가 커지는 험악한 윷판이다가도, 시원한 콜라와 땅콩과자에 또 가족이 된다. 자식 자랑, 마누라 자랑, 싱거운 자랑도 고개를 끄떡이고, 편지라도 한통 받는 날이면 우르르 몰려들어, 웃고 슬퍼한 가족이었다. 모두 잘 계시죠?■




참고 문헌 및 관련 정보는 머리글에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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