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정기사와 류반장”

시즌 ⌜1⌟ 페르시아만을 걷다, 라히마 캠프

by 아문선

참, 장하십니다. 나도 남보다 한번 잘살아보겠다는 그 결심, 희망 하나로 활활 타는 사막에다 선인장꽃 같은 붉은 정열을 불태우고 있으니 까요.

-밀물|1978년 12월호|중동에 나가 있는 아우들에게|김여정|작가-



기사님 나오십니다

훈련을 위해 D산업은 20대 후반의 정기사와 40대 후반의 류반장을 학교에 파견한다. 선글라스를 쓰고 그리고 오른손에 007 가방¨을 든 정 기사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교문을 들어선다. 40대 중반 류 반장은, 하숙집 여주인이 만들어준 도시락 보자기를 뒷짐에 들고, 약간의 신분의 차이가 느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를 따른다. 정 기사의 포스|Force|는 공고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결국 샘소나이트|Samsonite| 서류 가방과 선글라스는 공고생의 귀국 준비 1호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007 가방: 첩보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드케이스의 서류가방


총각인 정 기사가 출근하는 길에는 교감 선생님도, 교무과장님도 그리고 미혼인 수학 선생님도 눈도장 찍기 바쁘다.

"정 기사님 불편한 곳은 없지라?" "오늘도 쪼가 수고 좀 해야 것네요"

앞쪽이 시원한 대머리 교감선생님이 다정다감하게 먼저 뻔찌를 날린다.

"하숙집이 불편할턴디..."

수학 선생님도 이에 뒤질세라 들릴 듯 말 듯 한마디 던진다.


정 기사님을 위한 프로토콜

하늘처럼 높아 보이는 정 기사님을 위해서 모두는 정성에 정성을 다한다. 50년 전통의 브라스 밴드부를 동원 "행진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교감 선생님의 제안을, 음악 선생님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한다. 학교에 도착하면, 우선 교장실로 안내되어 커피를 마신다. 교장 선생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정 기사와 교감 선생님이 자리한다. 류 반장은 손사례를 치며 말석에 자리를 잡는다.


한 명이라도 더 중동반에 보내고 싶은 교장선생님은, 오늘도 50년 전통과 학생들의 우수성으로 긴 시간을 보낸다. 약간 지루한 눈초리 라도 보이면, 산전수전 다 격은 교감선생님이 먼저 자리를 파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공고생들이 부동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교실로 안내된다. 50년의 세월을 증명하듯 파란색에서 하늘색으로 바래어버린 목재 문을 밀고 들어서면, 중동에 반드시 가고야 말겠다는 눈망울들이 뒤섞여, 뜨겁고 후끈한 열기가 교실을 가득 메운다.


총각 정 기사에 인기는, 하교 후에도 하늘을 찌른다. 혼기가 꽉 찬 딸을 두고 있는 하숙집 여주인의 정성도 눈에 뜨인다.

"어머~ 어쩐당가 이렇게 힘들어서."

퇴근 시간에 맞추어 대문 앞까지 뛰어나와 정 기사와 류 반장을 맞이한다. 50대인 하숙집 여주인은 밉지 않은 얼굴과, 싹싹한 말솜씨는 정 기사와 류 반장의 객지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같다. 그녀의 붙임성은 하숙생이라기보다는 10년 이상 알고 지낸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 같다.


맛에 고장 전주의 하숙집은 식사만큼은 갑종이다. 맛도 맛이거니와 20여 가지의 반찬과 3종류의 찌개는 기본이다. 밥 한 공기 먹는 일은 일도 아니다. 여수 출신 류 반장은 당연한 가정식 식사이지만, 서울깍쟁이 출신인 정 기사는 매 끼니 깜짝 놀라는 투로,

"아주머니! 하숙비 올려야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엄메~ 정 기사님 무슨 말씀이 랑가요.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디."

미래의 장모가 될 수도 있는 하숙집 여주인은 손사례를 친다. 때를 맞추어 큰딸이 숭늉을 들고 문 앞에 서성인다.


"엄마, 숭늉 가져왔는디~"

숫기가 없는 끈딸은 방문 앞에 숭늉을 놓고 쌩하니 부엌으로 사라진다.


식후 행사

다음날 아침이면 교실은 수근 거린다.

"어제는 병철이가 하숙집을 갔다는디."

그렇다, 밤이면 밤마다, 공고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숙집을 들락거린다. 명목은 객지에서 적적하실 정 기사님과 류 반장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십 대 공고생의 속은 빤히 보인다. 중앙동 풍년제과의 단팥빵이나 포도, 사과 이런 과일이 공고생이 준비할 수 있는 최대의 뇌물이다. 야식으로 삶은 계란도 있다.


아차~ 이렇게 머뭇거리다 난 출국을 못할 수도 있다 싶어, 부랴 부랴 가깝게 지내는 동수와 한편을 먹는다. 동수 고향집의 특산물인 지리산 곶감과 맥주 한 병을 준비한다. 하도 들어서 지겨울 정 기사님과 류 반장님의 고매한 성품, 깊이를 모르는 학문적 식견 등, 곶감만큼이나 달콤한 미사여구로 1시간을 보내고 나면, 류 반장님이 화답한다.

"걱정 말드랑게~ 느그는 우수생이여."


사우디 현장에서 다시 만난 우리의 영웅

2년쯤 지나고, 라히마 캠프에서 정 기사를 만났다. 그는 인근 쥬하이마 현장으로 발령받아 온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걸음걸이 그리고 아우라가 넘치던 모습은 추억이 되었다. 이제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저 그런 건설현장 근로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정직원이기는 하지만 전문대를 졸업한 5급 기사로, 현장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항상 "을"인 류반장님은 라히마 캠프에서 만나자, 넌닝구와 빤스바람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힘들제~ 건강 잘 챙기랑께.”




참고 문헌 및 관련 정보는 머리글에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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