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계절들

VOL.4 / 2023. 5월호. 시화로 전하는 시_9

by 숨 빗소리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산에 한그루 나무를 심었다

비좁은 화분에 듬쑥한 잎이며 가지를 거머안고 신음하던

나무


언젠가 깊이 좋아한 사람에게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게서 시들어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것인데


이제 산에서 쑥쑥 자라렴 화분 같은 건 잊고


누군가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웃으며 그는

유기(遺棄)로군, 말했다


유기로군, 나는 웃지 않았다


산을 떠올렸다

나무를 품은 비옥한 흙과 바람과 햇살 같은 따스한

그 산의 모든 것들


정말일까 그러나

산은 정말 산일까 흙과 바람과 햇살은,

그 사람은

지금 청청한 빛으로 살고 있을까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깊이 좋아한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엉긴 생각의 뿌리가 풀리지 않았다


산에 올랐다

나무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나무는 보이지 않고, 산에는 나무가 너무 많아

이토록 많은 나무는 누구의 소행일까


썩어 비틀어진 등걸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산의 부름을 받는 일이 남았다




- 박소란 <깊이 좋아했던 일> 전문




초록빛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입니다. 바람은 나무의 옷을 빌려 색과 소리를 얻습니다. 출근길 차창 너머로 넘실대는 오월의 초록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세월의 흐름을 생각합니다. 벌써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러왔네요. 어린 시절에 두고 온 지난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을까요.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딘가에서 오월 잔잔한 바람을 맞고 있을 무성한 나무일까요, 산에 조심히 옮겨 심었던 어린 날의 묘목일까요.


나는 내가 그리웠을까요. 그 시절 작은 것에도 설렘을 느끼던 청춘이. 캄캄한 미래로 이어질 것 같던 골목에서의 두려운 방황들이.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린 분노, 아픔, 고통들. 작은 바람에도 금방 뿌리가 뽑힐 것 같던 연약하고 불안했던 나날들이.


결국 내가 사랑했던 것은 그 시절 스쳐간, 그 수많은 나의 감정들이 아니었을까요. 산을 두리번거리며 어떤 한 그루의 나무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무성히 자랐고, 숲의 주인은 그곳을 가득 메우며 나무를 더 아름답게 흔들고 있는 세월의 바람들, 바람들.




<숨 빗소리_ 5월_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는 수시로 업데이트됩니다. )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용 시집 -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박소란 시인 - 2009년 <문학수첩> 등단. 신동엽문학상, 노작문학상 수상. 시집 <있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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