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유

VOL.4 / 2023. 5월호. 쉽게 씌어진 시_4

by 숨 빗소리

프롤로그

– 스무 살 생존일지




1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팔월의 땡볕이 가득한 이 광장에 모여 있는 것일까. 나는 이 광장에 모여 있는 교사도, 교대나 사범대를 다니고 있는 예비교사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며칠 전까지도 이제 그만 생명을 끝내고 싶었던 스무 살일 뿐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러다가 무심코 뉴스를 보았을 뿐이었다. 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젊은 교사의 이야기를. 나보다 불과 서너 살 많았을까. 하지만 그 죽음에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내가 죽고 싶었던 까닭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죽음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그래서 나 역시 이 광장에 나와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을 모은 것은, 그동안 숨죽여 왔던 자들을 이 자리에 모이게 만든 것은 교실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죽음을 겪으면서 내가 죽을 이유는 사라졌다. 애초부터 그런 이유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나는 하나의 죽음이 더 강한 삶의 의지로 연결되는 광장의 한복판에 서있고 싶었다. 나도 그녀의 이유가 되고 싶었다.

나는 더... 살아도 되는 걸까. 눈가에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입술에 닿은 건 짜디짠 맛이 느껴지는 삶의 생생한 미각.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듣고 함께 느껴보았다. 아직 어린 나도 저들이 될 수 있을까. 힘겨웠고 힘겨웠던 그녀가, 그녀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2


잊을 수 없는 꿈을 꾸었다. 그건 내가 그토록 바랐던, 내가 죽는 꿈이었다. 아니 죽은 꿈이었다. 아니 사실은 꿈에서 죽고, 현실에선 살아 있었으므로, 그건 어쩌면 죽은 내가 다시 살아나는 꿈이었다.


부활의 꿈.


살아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꿈이 나에게 말하는 게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야만 했다. 그 메시지를 이해해야만 했다. 그동안 죽은 사람들이 산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꿈이 되는지도 몰랐다. 남겨진 우리들은 그렇게 꿈을 통해 죽은 이들과 소통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그렇게 듣는다.



3


시를 썼다.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한 솔직한 문장들을. 그건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당신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걸 그 시를 쓰며 알게 됐다.




우리의 이유



장례식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기억나는 친구들조차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만히 앉아서 말이 없었고

그러나 어둡고 무거운 표정만큼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숨길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울고 있는 누나도 보였다

어린 시절 가난함을 함께 싸우며

고생을 나눈 남동생이

이렇게 먼저 세상을 등질 줄은 몰랐으리라


그리고 어린 시절의 우리를 키우느라

두 무릎이 닳아버린

불쌍한 할머니도 보였다

사이가 안 좋은 할머니를 피해

숨어 앉은 엄마의 모습도

어딘가에 있었겠지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들을 향해 '나 여깄어!' 외쳐보았다

아무도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 몸은 둥둥 떠다니며

그들 주위를 맴돌다가

장례식장을 나왔다


우리 집과 고향 마을을 떠돌았다

어린 날의 풍선처럼 떠올라

그 모든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그때 갑자기

새벽 화물열차가 긴 소리를 울리며

덜커덩덜커덩

내 스무 살의 하숙집 창밖

멀지 않은 철로를 스쳐 지나갔다


아직 채

어둠이 물러가기도 전 그 새벽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일생의 모든 슬픔이 다녀갔다는 듯

캄캄한 방

불도 켜지 않은 채

꺼이꺼이 오랜 울음을 토해냈다


그날의 꿈

그 스무 살 악몽 이후로 나는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빚진 채

살아가고 있음을

신들의 눈을 피해

몰래 엿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히

갚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4


나는 내 스무 살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내 스무 살이 어떻게 세상에 스며들어 싸워나가는지. 나와 가족들과 당신들을 위해 내 청춘이 어떻게 귀하게 쓰임을 받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가는지. 하지만 어쩌면 나 혼자만으론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우리를 모았다. 나 역시 나와 너와 우리들의 손을 함께 잡으려 한다. 놓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지만, 그녀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구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끝까지 살아남아, 죽음이 아닌 나의 삶으로써 앞으로 자라나는 너희들을 살릴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스무 살 예비교사다.




포스트잇 나무 (추모시)

*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유명(幽明)을 달리한 소중한 젊음을 추모하면서...



내 것을 떼어

네게 붙이는 거

붙였다가 시간의 힘에

떨어지기도 하는 거

그렇지만 오래도록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눈에 띄게

기억하고 싶은 거

직접 찾아서

직접 붙여야만 하는 거

대신 붙여주지 않는 거

나 자신을 자신에게

내 이름을 네 이름에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자그마한 책상 위

캄캄하고 쓸쓸했던 사각의 공간

실눈 같은 전등 하나 켜놓고서

그녀 자신을 붙여 놓은 적

있었겠지

있었겠지

나는 할 수 있다

너는 최고야

라는 긍정의 문장들을

몸 위에 새겨 놓았겠지

마음에 붙여 놓았겠지

지루한 전공서적 속에

고단한 생들의 기출문제집에

어쩌면 골목길 노란 민들레 같은

위로의 문장 위에

그녀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붙였을지도

그렸을지도

살고 싶었던 눈부신 색채

간절했던 꿈의 문장

그런데 왠지 너무 쉽게

툭 하니 떨어지는

한 번 붙었다가 떨어진 것들

애써보아도 애써보아도

더 쉽게 사라지는

그녀가 남겼을 페이지 속

알록달록 포스트잇들이

그녀의 비문 위에

하나둘 점점 늘어나서

벼랑 아래의 손을

다른 손이 움켜쥐듯

떨어질 것 같은 파랑 위에

다시 떨어질 것 같은 노랑이

그 위로 아슬아슬한 분홍이

한 장 한 장의 초록이

쉽게 떨어지지만

거대한 무지개들은 한데 뭉쳐

살아있는 나무가 되는

나뭇잎 한 장 한 장

바람에 떨어져도

한 번 피어난 나무는 쉽게

꺼지지 않는







(7월의 아픈 사건을 겪은 후 내용을 추가 및 수정하였습니다.)


<숨 빗소리_ 5월 신작원고_허민 시>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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