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서면 멀어지는 것들

VOL.6 / 2023. 7월호. 시화로 전하는 시_15

by 숨 빗소리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난생처음 지평선을 마주한 아이에게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말했다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 그러자 아이가 물었다 지평선이 뭐야? 슈레버는 곡식의 낟알을 살찌우는 가을볕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만든 선 그것이 지평선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물었다 지평선에 갈 수 있을까? 슈레버는 황금빛 평야를 가로지르는 실개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다 그러자 아이가 되물었다 지평선에 가면 지평선을 밟을 수 있을까? 슈레버는 해넘이를 등지고 홀로 날아가는 홍부리황새의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평선에 가면 지금의 지평선은 사라지고 또다른 지평선이 멀리 보일 거란다 그러자 아이가 또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평선에 결국 갈 수 없는 거 아냐? 슈레버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에 점점이 흩어져 이따금 허리를 펴는 농부들의 기지개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가가는 만큼 지평선은 밀려나며 멀어질 거란다 그러자 아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빠가 거짓말한 거 아냐? 슈레버는 느긋하게 물결을 만들다가 사라지는 곡창지대의 여린 하늬바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아 나도 지평선은 처음이구나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좀처럼 해가 질 것 같지 않은 서녘의 시간 속에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슈레버는 옆에 선 아이에게 한 발짝 다가섰지만 아이는 그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 임경섭 시 <지평선> 전문






어쩌면 인생은 묻고 대답하고 묻고 대답하는 길들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기 위해 다가서지만, 매번 바라볼 때마다 모르겠어서 다시 처음인 것만 같은 이 기분. 지평선에 다가서면 또 다른 지평선이 멀리서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 지평선에 다가섰던 것일까요.


한 걸음 다가섰다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또 그만큼 멀어진 것 같은 사이. 쓸수록 점점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문장. 관측할수록 더 알 수 없는 것들만 무수히 발견하는 우주의 암흑물질. 진리, 예술, 사랑...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두 사람은 걸어갑니다. 두 생명을 공부합니다. 두 존재를 생각합니다. 지평선을 드디어 밟아 보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모습으로 저 멀리 물러나 있는 지평선. 하여 우리는 영원히 닿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지평선을 향해 다시 걸어갑니다. 우리는 지평선에 닿을 겁니다, 그런 문장들을 쓰기 위하여.


반드시 직접 닿아야만 간 것은 아니겠지요. 먼 별들을 한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경들. 그럴 때 지평선은, 아니 별은, 아니 내가 닿고자 했던 그 캄캄한 눈동자도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숨 빗소리_ 7월_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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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 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용 시집 - 임경섭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창비, 2018

임경섭 시인 -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시집 <죄책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