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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Dec 15. 2023

떠난이들

이창호 작가의 '2023년 올해의 글'

 *<숨 빗소리> 12월호는 참여 작가들의 2023년 발표글 중 가장 인상적인 한 편을 선정하여 공개합니다.  

웹 동인지 형식으로 시작한 <숨 빗소리>의 한해를 되돌아보며, 새해엔 더 발전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떠난이들(2~3편)

- 이창호



<두 번째 이야기>




농부의 아들




 1


 성열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약혼녀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며 미소를 보이면서도 딴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성열이 꿈에 그리던 여자다. 성열은 여자의 외모보다 학벌, 직업 등을 따졌다. 그녀는 금성방송 뉴스 앵커다. 둘은 한 달 뒤 결혼식을 올린다.

 성열은 며칠 전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자신이 감옥에 갇힌 꿈을 꿨다. 포승줄에 묶인 감촉까지 느껴져 더 두려웠다. 지난밤 악몽을 떠올리는 성열을 그녀가 불렀다. 성열이 듣지 못하자 그녀는 목소리를 키웠다.

 "오빠! 무슨 생각해? 웨딩드레스가 조금 작은 거 같지 않냐고 물었잖아."

 "아아. 미안해. 회사에 밀린 일 생각하느라 깜빡했네. 그럼 한 치수 큰 거 입어볼래?"

 성열은 천체경제신문 기자다. 지방대를 나와 지역신문 기자를 거쳐, 서울에 명성 있는 경제지 차장까지 승진했다. 남들은 성열을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한다. 자수성가는 아니다. 지방에서 부모님이 쌀농사를 제법 크게 짓는 덕분에 지방대, 지역신문 기자생활에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반면 그녀는 명문여대를 나와 높은 경쟁률을 뚫고 금성방송에 입사했다. 성열이 그녀에게 끌린 이유가 여기 있다.



 2


 민주는 혜성신문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됐다. 우주시 출입기자로 평판이 좋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어울리는 데도 수월하다. 운동도 잘해 대다수 공무원들의 ‘최애’ 기자다. 골프를 잘 쳐 함께 라운딩하자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도 민주는 시청 입구에 출입증을 찍고 당당히 들어간다. 청원경찰이 민주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미소를 보이며 기자실이 있는 쪽 계단을 오르는데, 민주는 머리가 아팠다. 어젯밤 악몽으로 잠을 설쳤다. 민주는 수백 번 넘게 같은 악몽 속 잠에서 깬다. 수년 전 일어난 그 사건이 민주를 짓누르고 잠에서 깨면 하염없이 운다. 결국 민주는 약에 의존해 잠을 청한다. 민주는 악몽과 불안 증세에 시달려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민주가 그 일을 당했을 때와 악몽은 내용이 정확히 일치한다. 민주는 꿈속에서 가위에 눌려 일어나지 못한다. 민주는 이 불안감과 악몽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를 일어나지 못하게 옥죄는 사람은 남자다. 그 남자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사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인 민주를 더듬고 만진다. 끝내 일어나지 못한 민주는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런 꿈을 민주는 오랫동안 꾸고 있고, 이 꿈은 민주를 그 사건이 일어난 그때로 돌려보낸다. 성적수치심뿐 아니라 그날의 더러운 음성과 손길까지도 다시 체험하는 것 같아 잠들기 두렵다.



 3


 8년 전.

 "깨톡"

 민주가 잠에서 깼다. 자정을 넘은 시각. 그놈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민주에게 사수를 자청한 그놈이었다. 술에 취했는지 그놈은 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내 진심을 받아줘.’

 이런 내용의 문자를 그놈은 자주 보내고 있다. 민주는 문자에 대답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그 말을 믿지도 않지만, 용서할 생각도 없다. 민주는 혜성신문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수습기간이라며 궂은일을 다했다. 태어나서 처음 새벽까지 경찰서에 있어봤고 모르는 사람 장례식장에 가서 ‘누가 왜 죽었나’ 확인도 했다. 대형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유족 인터뷰는 정말 못할 짓이었다.

 민주는 혜성신문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젊은 시절 교사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권유가 없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곳이었다. 민주는 명문여대를 나와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수재다. 학창 시절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고 서울에 신문·방송사 문을 두드렸다. ‘언론고시’라는 말처럼 서울은 문턱이 높았다. 낙담한 민주를 보고 민주의 아버지는 지역언론인 혜성신문을 추천했다.

 혜성신문은 민주를 반겼다. 보기 드문 인재였다. 학보사 출신인 민주는 글도 매끄러웠다. 취재기법이야 알려주면 될 일이니,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됐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민주는 천군만마였다. 민주의 교육을 맡은 건 진풍이었다. 지역신문은 교육방식이 정립되지 않은 집단이었다.

 사회부장이 있지만 교육을 맡을 여유가 없어, 3년 차인 진풍에게 경찰서 보고를 받도록 했다. 진풍은 기존 방식대로 민주를 경찰서에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수습기자들은 6개월 동안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야간, 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확인했다. 빈손일 때가 많았지만 배포는 키울 수 있다는 낡은 방식이었다. 진풍은 현실을 택했다. 조석으로 다니던 경찰서를 출근 전에만 다녀오고 낮에는 취재와 기사작성, 저녁에는 취재원을 만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민주는 기자생활에 안정을 찾아갔다.



 4


 성열은 천체경제에 오기 전 회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후배 기자인 미주가 성열을 신고한 것. 미주의 신고로 성열은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미주는 사내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성열이 원하지 않는 술자리에 불러 자신을 집에 못 가게 했고 바래다준다는 핑계로 차 안에서 자신을 만지려 했다. 소리를 질러 그 자리를 피했지만 밤새도록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반복하고 다음날 미안하다고 했다. 술에 취해 그런 건가 생각해 사과를 받아줬지만 또 다른 날 불러내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낮에는 선배랍시고 가르치려 하고 화를 내고 꼬장을 부리는데, 밤에는 미쳐 날뛰는 놈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밝힌다.’

 미주의 글은 순식간에 전직원에게 퍼졌고 성열에게 부서장과 사장이 전화를 걸었다. 부서장은 "사장이 아무래도 결단을 내릴 것 같다"고 말했다. 잠시 뒤 성열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성열아 법이 바뀌어서 징계 절차를 밟지 않으면 내가 처벌을 받게 돼 있다. 미주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진행할 거고 너도 할 말 있으면 하고."

 "그냥 그만두겠습니다. 그럼 그런 거 꾸릴 필요 없잖아요."

 "그래 그럼 서로 피곤하지 않지."

 성열은 사표를 제출하고 회사를 나갔다. 미주는 사장이 순순히 사표를 수리해 준 것이 불만이었지만 2년 차인 미주가 더 목소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성열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징계뿐 아니라 형사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5


 기자생활에 안정을 찾던 민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풍 몰래 성열이 민주를 자꾸 불러냈다. 취재원을 소개한다며 술자리에 불러냈다. 민주가 순환교육을 받으러 성열이 있던 정치부에 갔을 때, 민주는 성열과 바닷가에 가게 됐다. 취재거리가 있다며 차에 태워 성열은 민주를 1시간 거리에 바닷가에 데려다 놨다.

 "선배, 여기서 어떤 취재하는 거예요?"

 "취재? 음 바다쓰레기가 얼마나 있나 파악해 볼까? 하하하."

 성열이 크게 웃었다. 민주가 거짓말임을 깨달았을 때 성열이 말했다.

 "취재라는 핑계로 바닷가도 올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바닷바람을 즐겨봐. 여기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가자."

 민주는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성열은 민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조개구이 먹을까? 회를 먹을래?

 "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요."

 "점심은 먹고 가자, 해물칼국수 어때?"

 "네."

 식사를 마친 둘은 성열의 차에 올랐다. 갑자기 성열은 민주의 안전벨트를 매 준다며 다가왔다. 민주는 얼굴을 돌리긴 했지만 몸을 피할 수 없었고 성열은 민주의 벨트를 채웠다. 민주는 ‘입을 맞추려고 한 건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성열이 말을 걸었다.

 "아까 시킨 건 다 했어?"

 "아 그게, 지금 여기 오느라 못했어요."

 "그럼 도착하면 그것부터 마무리하고 보고해."

 민주는 ‘지가 오자 해놓고 갑자기 왜 저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6


 성열은 시청 기자실, 실·국·과 사무실을 오간다. 며칠째 사회복지과 사무실 앞에 붙은 배치도를 바라봤다. 과장과 매일 같이 다과를 하러 갔다. 사회복지는 성열이 관심 많은 분야가 아니다. 성열과 한 팀에 있는 후배들이 주로 취재하는 분야다. 사회복지과장은 성열이 자주 와 불편해졌다. 옆 사무실 과장에게 ‘왜 저러는지’ 물어봤다.

 "아니 혜성신문 시청 캡이 왜 이렇게 자주 와? 뭐 딱히 꼬집는 것도 없고 와서 헛소리나 하다 가는데 왜 저러는 거야?"

 "아 그 인간. 히히히. 술 한 잔 하고 싶다 그걸 걸. 뭐 그렇게 날카로운 취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술 한 잔 사주면 알아서 기어."

 옆 사무실 과장은 대변인실에서 기자들을 상대해 봤기 때문에 그들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과장은 자기 밑에 팀장, 팀원 등을 데리고 성열을 만나러 갔다. 성열은 같은 팀 기자들을 불러 술자리에 갔다.

 ‘삶은농부’라는 식당은 정관계 인사, 언론인 등 유력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외부 식탁은 4개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개별 방으로 돼 있다. 사회복지과 사람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고 성열이 방문을 열었다. 과장을 포함해 4명의 공무원이 나와 있었고 과서무를 맡은 진경도 나와 있었다.

 술자리는 마치 전투처럼 치러졌다. 4대 4로 마주 앉아 앞사람 술잔을 바라보며 "술잔이 비었다. 나는 마셨는데 왜 마시지 않느냐"는 둥 앞사람이 먹은 만큼, 받은 만큼 마셔야 했다. 성열이 이런 방식으로 몰아갔다. 다들 취했지만 2차 맥주집까지 자리가 이어졌다. 진경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후배인 나만 빠질 수 없지’라며 버텼다. 결국 맥주집에서 기억을 잃었다.

 눈을 뜬 진경은 소스라쳤다. 알몸이었다. 장소는 시청 근처 한 모텔. 어제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을 관통한 그 강렬한 기억이 있었다. 누군가 진경의 옷을 벗겼고 진경은 필사적으로 막았다. 남자는 술에 취한 진경을 쉽게 제압했고 진경 위에 올라탔다. 진경은 자기 위에 올라탄 남자를 깨물었다. 끈질긴 그놈은 멈추지 않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진경 위에서 내려왔다.

 기억의 조각을 맞춘 진경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시곗바늘은 8시 30분을 가리켰고 진경은 일어나 시청으로 출근해야 했다. 성열이 며칠째 사회복지과 배치도에서 바라보던 사진 속 인물은 진경이었다.



 7


 민주는 성열에 부름에 시달리고 폭음으로 인한 블랙아웃이 생겼다. 그럭저럭 6개월이 지나 수습 딱지를 떼고 민주는 경찰청 2진으로 배치됐다. 민주가 마감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성열이었다.

 "지금 경찰청 앞에서 다른 선배들이랑 한 잔 하는데, 들렀다 가."

 민주는 거절하지 못했다. 성열의 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성열은 민주가 부름을 거절하면 어디, 누구, 왜를 계속 캐물었다. 웬만하면 타인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민주의 성격을 파악했다. 수차례 성열의 집요함이 계속되면 민주는 꼬리를 내렸다.

 민주가 술집에 도착했을 때 통신사, 신문 등 기자 4명이 있었다. 민주보다 모두 언론 선배였고 신참인 민주를 반겨줬다. 성열은 민주에게 폭탄주를 따라 주고 자신이 마실 때마다 따라 마시길 강요했다. 이런 술자리를 민주는 성열 때문에 자주 했다. 기자생활이 꼬인다고 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성열은 자신이 소개하는 사람들만 잘 알아둬도 기자생활이 편해진다며 민주를 압박했다.

 돌이켜보면 민주는 성열에게 ‘가스라이팅’ 돼 있었다. 함께 술자리에 있던 통신사 기자는 억지로 술을 마시는 민주에게 ‘잘 마신다’며 술을 더 권했다. 민주는 어쩌면 블랙아웃을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는 술자리에서 사라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민주는 필름이 끊겼다.

 민주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놈이 자신의 옷을 다 벗겼다. 반항하고 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 못 했다. 그놈은 민주에게 말했다.

 "좋아? 난 너무 행복해. 사랑해. 오랫동안 꿈꾼 시간이야."

 민주가 "하지 말라"고 계속 외쳤지만 그놈은 멈추지 않았다. 그놈은 민주를 매일 악몽에 빠트리는 주범이다. 민주는 그놈 밑에서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그놈이 붙잡을까 두려웠다. 그놈이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말할까 두려웠다. 몇 시간 뒤 회사에서 그놈 얼굴을 마주쳐야 했다. 그놈은 성열이다. 진경을 성폭행한 그놈도 성열이다.



 8


 민주는 며칠째 몸살에 시달렸다. 민주 아버지는 며칠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민주가 술병이 났다며 나무랐다. 민주는 이런 식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잘못을 민주 탓을 한다.

 "아이고, 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마셔서 몸 고생을 시키니."

 "아니라니까."

 민주는 이불속으로 머리를 감췄다. 머릿속에는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왜 깨물지 못했을까’라고 후회해 보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가기 싫었다.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유가 뭐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너가 술을 그렇게 마시고 처신을 잘못하니 그런 일을 당하지’라고 아버지가 말할 것 같았다.

 민주는 다음날 진풍을 찾아갔다. 남구청에 있던 진풍은 민주가 찾아온다고 할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진풍은 민주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민주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진풍에게 보여줬다. 성열이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잘 들어갔어? 난 어제 너무 좋았어. 다음에는 우리 더 즐거운 시간 보내자.’

 ‘왜 연락이 없어? 우리 이제 사귀는 거야. 사내연애 너무 하고 싶었어.’

 ‘나 샤워하고 나와서 뽀송뽀송. 지금 거기서 만날까?’

 진풍은 감지했다.

 "민주야. 미안하다. 내가 지켰어야 했어. 조금 더 널 신경 썼어야 했는데, 어울리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무서워요."



 9


 진풍은 민주가 당한 그날 술자리에 누가 참석했는지부터 파악했다. 장소도 확인했다. 참석자는 성열을 포함해 4명. 모두 업계에 소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다. 통신사 기자는 기혼자이지만 후배 기자와 밀회를 나눴고, 그 후배가 성열과 사귀자 술잔을 집어던졌다. 치료비와 위자료 수천만 원을 냈다. 나머지 둘은 몰려다니며 취재보다는 세력을 과시하며 공무원들을 빼먹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진풍은 민주의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성열에 대해 조사했다. 그의 간악함은 끝이 없었다. 혜성신문에 입사한 모든 여직원이 성열의 문자메시지, 전화로 고통받았다. 심지어 경쟁사 일부 여기자를 스토킹 했다. 성열이 술자리가 끝난 뒤 여기자의 집까지 찾아갔던 것. 성열은 7∼8년 차이나는 선배에게도 추근거렸다. 경영지원부서 여직원은 성열의 스토킹 때문에 퇴사했다.

 진풍이 성열에 대해 조사하는 사실을 공무원노조가 알게 됐고 성열에게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우주시공무원노조입니다. 성열 기자에게 피해 입은 공무원들이 있습니다."

 "네? 정말이요? 공무원들? 인가요?"

 "네. 성폭행도 있고 성추행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하고 싶답니까?"

 "만약 다른 피해자가 나서서 고발해 주면 자신들도 가서 진술하겠다고 합니다."

 "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진풍은 민주가 있는 경찰청으로 갔다.

 "민주야. 내가 너와 대화를 마치면 사장에게 보고하러 갈 거야. 내 생각에는 그전에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지금 피해자가 더 있는 것도 확인했어."

 "아 그럼 아빠가 알게 되겠죠? 가족들이 알게 되는 건 싫어요. 그냥 성열선배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면 좋겠어요."

 진풍이 신고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민주는 "부모님이 아는 건 싫다"면서 계속 울었다.



 10


 진풍은 고민에 빠졌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것 같았다. 성열은 진풍을 다른 후배보다 챙겼다. 서로 고향이 같진 않지만 비슷한 시골 출신이었다. 진풍은 성열의 허풍에 속아 같이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성열은 권위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진풍이 성열과 잠시 프로젝트팀으로 묶여 있을 때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부장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혼이 났다. 그 프로젝트팀은 임시여서 각자 소속 부서가 달랐고 진풍이 보고할 이유도 없었다. 진풍이 2년 차 시절이었다. 진풍은 사과해야 빨리 끝날 걸 알고 성열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진풍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민주가 성열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계속 스토킹 피해를 입고 있다고, 피해자는 민주뿐 아니라 우주시 공무원, 혜성신문과 다른 회사 직원 등 다수라고 적었다. 혜성신문 사장실로 보고서를 뽑아 들어갔다.

 "사장님. 제가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사장은 보고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 진풍아. 사실 우리 직원들에게 집적거리는 건 알고 있었어. 공무원이나 다른 회사 직원들까지 그러는지 몰랐다. 민주가 상심이 클 텐데 어떡하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사장의 말에 순간 진풍은 화가 치밀었다.

 "사장님. 인사위원회를 열어 해고해야 합니다. 민주가 알려지길 원하지 않으니 비공개로 처리하면 좋겠습니다."

 "어 그래. 확실히 정리할게."

 진풍이 나가자 사장은 성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인마. 너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지금 해고하라는 말이 나오냐. 민주 일 어떻게 된 거야?"

 "아 사장님. 그게 제가 일방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민주도 오케이 사인을 준 겁니다. 민주랑 조만간 정식 교제할 겁니다. 걱정마세요."

 "그래도 안 돼. 진풍이가 알았어. 권고사직으로 처리하자. 더 이상 감싸지 못한다. 끊는다."



 11


 성열은 혜성신문 사무실에서 짐을 싸 나왔다. 8년을 다니던 회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분했다. 민주를 사랑했을 뿐인데, 이런 일이 일어난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장은 진풍이 작성한 보고서를 성열에게 보여줬다.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처벌은 피해야 했다.

 진풍은 사장이 성열에게 사직서를 받고 내보냈다는 말에 화가 났다. 성열이 형사처벌도, 징계도 받지 않고 저렇게 떠나면 분명히 다른 회사에 기자로 입사할 게 뻔했다. 사장이 2차 가해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매사 온정주의로 일관한다.

 진풍은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주야. 지금 성열이 나갔다. 내 생각에는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얘기해 줘."

 "네. 감사합니다. 이 일 잘 해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진풍은 공무원노조에도 전화했다.

 "위원장님. 진풍입니다. 피해자가 신고를 원하지 않아서요. 공무원들 따로 신고하면 어떨까요? 이대로면 어디 다른 데 가서 또 그럴 겁니다."

 "네. 설득해 볼게요. 공무원 특성이 몸을 사려서요. 일단 그쪽에서 나서줘야 신고할 것 같아요. 계속 대화해 볼게요."

 전화를 끊고 진풍은 한 동안 끊었던 담배를 사러 갔다. 사장이 꼴 보기 싫었다. 성범죄자를 순수한 상태로 내보낸 게 싫었다. 강제로 쫓아내야 할 사람을 사장이 너무 쉽게 떠나보냈다.

 성열은 사장이 쓰라면 쓰고 쓰지 말라면 쓰지 않던 개였다. 사장은 성열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놈이라 생각했다. 사장에게 성열이 민주보다 귀했다. 성열은 혜성신문을 그만두고 같은 지역 경쟁사에 문을 두드리다, 되지 않았고 서울의 한 경제지에 들어갔다. 그 경제지가 미주가 있는 그곳이었다.


 민주는 이때부터 골프에 몰두했다. 골프가 민주를 살렸다.



- 웹진 <숨 빗소리> 2023년 3월 발표


(두 번째 이야기는 세 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무제> 배민채 2023

<세 번째 이야기>




교사의 딸



 1


 우주시내 한 골프장. 잠을 설친 민주는 남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전날도 성열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오늘 라운딩은 민주와 친한 언니, 그의 남편, 그리고 그들이 소개한다는 변호사가 함께한다.

 민주가 클럽하우스 로비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민주의 상사 진한이었다. 민주는 머리를 숙이고 휴대전화에 집중하는 척했다.

 "아 맞다! 그거 알아요? 예전 저희 회사에 있던 성열 기자 알죠? 이번에 결혼한대요."

 "정말요? 부장님 참석하실 건가요? 축의금을 어떡해야 하나요?"

 "저는 가야죠. 알고 지낸 지 10년 넘은 걸요. 저 주세요."

 민주는 갑자기 토악질이 나왔다. 진한이 지나가자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았다. ‘그 호로새끼가 결혼을 한다고?’ 민주는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변기에 앉아 머리카락을 부여잡는 방법밖에 없었다. 잠시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언니였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로비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민주는 처음 본 변호사와 명함을 주고받았다. 머릿속이 하얀 민주에게 골프를 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9번 홀을 마치고 ‘하늘집’에서 민주는 술을 마셨다. 라운딩 도중 술을 마시지 않는 민주가 술을 마시자 언니가 놀라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 있니? 오늘 저 변호사 너 보라고 데리고 온 건데, 너 영 컨디션이 나빠 보이네. 말도 없고."

 "언니 오늘 그럴 정신이 아니야. 나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온 민주는 약을 먹어도 두통이 가라앉지 않자 술을 마셨다. 밤새 토악질이 멈추지 않았다.     



 2


 오전 6시. 겨우 토악질을 멈춘 민주가 휴대전화를 누르고 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ㅅ.ㅣㅇㅇ..ㅣㄹ ㄱ..ㅣㄹㅎ.ㅡㄴ을 눌렀다. 민주는 너무 치욕스러웠지만, 알아야 했다.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성열(000·000 씨 아들) 천체경제신문 차장·소연(000 칠성전자 상무·000 씨 장녀) 금성방송 앵커=4월 16일 00시 000 웨딩홀(서울 모처). ☎010-0000-0000’     


 민주는 소스라쳐 휴대전화를 집어던졌다. 무서웠다. 스스로 괴물을 키운 것 같았다. 휴대전화는 먹통이 됐다. 노트북을 꺼내 깨톡을 켰다. 진풍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배. 이거 봤어요?"

 진풍은 민주가 다급하게 무얼 말할지 예상했다. 몇 주 전 진풍의 깨톡에 배경을 바꾼 친구가 떴는데, 그때 성열이 보였다. 성열은 당당하게 결혼사진과 결혼식 일시장소를 적어뒀다. 진풍은 주기적으로 성열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회사에서, 어느 직책에 있는지. 진풍은 모른 척 대꾸했다.

 "응. 어떤 거?"

 민주는 성열의 결혼식 정보가 나온 신문기사를 보냈다. 진풍은 오랫동안 민주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민주야. 그때 그래서 경찰에 신고까지 하자고… 미안하다. 내가 널 설득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게 나도 최선인 줄 알았어."

 "아니에요.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돌이킬 생각 있니?"

 "네."

 진풍은 성폭행 공소시효를 검색하면서 민주를 만나러 갔다.     



 3     


 민주는 초췌했다. 진풍은 민주에게 성폭행 공소시효가 10년이라 고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을 찾아 함께 고소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주미를 찾아야 했다. 민주는 아직도 불안했다.

 "선배. 아버지가 알게 되겠죠?"

 "아무래도 알게 되실 거야. 아버지도 네 편이 돼주실 거야."

 진풍은 민주를 달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은 2주다. 피해자들을 찾아 공동 대응해야 한다. 칠성전자 상무에게 알려야 한다. 신부에게는 어떡할까.’

 "아 참. 민주야. 변호사는 어떡할래? 내가 아는 변호사를 소개할까."

 민주는 머릿속에 며칠 전 라운딩이 떠올랐다.

 "아 선배. 제가 아는 언니가 잘 아는 변호사가 있어서요."

 "응."

 민주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그때 그 변호사 이름이 모야? 믿을 만하니까 나 소개한 거지?"

 "당연하지. 전화번호 보내줄까?"

 진풍이 소개하는 변호사도 믿을 만하겠지만, 민주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민주는 언니가 보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민주와 진풍은 경찰청 근처 커피숍에서 상일을 만났다. 상일은 사건 해결능력도 좋지만 의뢰인의 심리 파악을 중요시하는 변호사다.     



 4     


 지난 라운딩 때 상일은 민주를 유심히 관찰했다. 민주는 초조해했고, 민주의 손은 떨렸다. 다시 마주한 민주는 달라져 있었다. 결심에 찬 얼굴, 각오를 다진 맵시를 보였다. 셋은 상의했다. 진풍은 성열과 칠성전자 상무에게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민주는 주미를 만나고 다른 피해자들을 모으기로 했다. 상일은 고소장을 작성하고 민주와 피해자들을 함께 설득하기로 했다.

 진풍은 갖고 있던 성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성열 차장님, 진풍입니다."

 "어, 오랜만이네. 갑자기 무슨 일로?"

 "8년 전 성폭행 사건 기억하시죠? 조만간 고소할 예정입니다. 자수할 기회를 줄게요."

 "이런 개새끼가,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전화를 건 거야. 우리 장인이 누군지 알아?"

 성열은 무례하게 전화를 끊었다. 진풍은 성열에게 문자를 남겼다.

 "자수하지 않는다고 하니 자랑스러워하는 장인에게 전화드릴게요."

 진풍은 칠성전자 상무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칠성그룹은 우주시에서 바이오산업을 하기 위해 땅을 찾고 있었다. 칠성바이오에 출입하는 후배에게서 상무 전화번호를 받았다. 상무는 진풍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풍은 문자를 보냈다.

 "상무님, 혜성신문 진풍 기자입니다. 따님 결혼 관련해 전화드렸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몇 시간 뒤. 진풍은 성열과 상무에게 연락한 자체가 피로해 쉬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쪽문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진풍은 ‘억’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옆구리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범인은 진풍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고 사라졌다. 전화벨이 울렸지만 진풍은 듣지 못했다.     



 5     


 "왜 전화 안 받을까요."

 "볼 일이 있으시겠죠."

 민주는 상일과 주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상일이 먼저 동행을 청했다. 주미는 민주의 기대와 달리 나서길 꺼려했다. 주미는 지난해 결혼해 최근 임신했다. 3개월째 접어든 상태에서 성폭행 사건 피해자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도 부담이었다. 대신 주미는 공무원노조와 함께 다른 피해자를 찾아본다고 했다. 민주는 진풍에게 다시 한번 설득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돌아가는 길 상일은 민주에게 식사를 제안했다.

 "민주 씨 저녁 먹고 가실래요?"

 "싫어요."

 상일이 시무룩해졌다. 민주가 다시 입을 뗐다.

 "지금 이 상황에 밥은 못 먹겠고요. 술 한 잔 하시죠."

 상일은 미소 지었다. 민주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둘은 치킨 집으로 들어갔다.     



 6


 맥주를 마시다 말고 민주와 상일은 달리고 있다. 진풍이 칼을 맞아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진풍의 가족들이 와 있었다. 아파트 계단 끝에 쓰러진 진풍을 발견한 경비원이 119를 부른 뒤 관리실 직원들과 응급 처치했다. 그 덕에 응급 수술을 받고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진풍의 아내가 인사했다. 민주와 상일이 인사를 건네자마자 그의 아내는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칼을 맞느냐"고 물었다. 민주는 자신의 성폭행 사건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상일은 성열이 해코지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뱉지 않았다.

 10시간 만에 진풍이 눈을 떴다. 진풍은 가족들과 민주, 상일을 바라봤다. 진풍의 아내가 "칼이 장기를 피해 살았다"고 말하며 걱정했다. 진풍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회사 일로 얘기할 게 있으니 잠깐 나가줄래?"

 "어? 어. 그래."

 진풍은 민주와 상일에게 성열이나 칠성전자 상무가 칼잡이를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고소하면 성열 측 반발이 심할 테니 피해자들을 모아서 기자회견, 언론 인터뷰 등을 함께 진행해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낀 진풍은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상일에게 입었던 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상일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찾았다.

 ‘지금 진행하는 일 그만두시오. 다음번에는 살아서 가족들 얼굴 못 볼 겁니다.’     



 7


 상무는 성열을 불렀다.

"식이 2주도 안 남았는데, 소연이 어떻게 설득할 텐가?"

 상무는 자신의 승진을 위해 성열을 선택했다. 성열이 경제신문 부장이 되고 편집국장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소연이 설득된다면 결혼식을 강행할 예정이다. 언론에도 알려 놓은 상황에서 돌이킬 수 없었다. 변호사도 사줄 생각이다.

 "장인어른, 저는 무죄입니다. 흔히 ‘썸’이라는 걸 탔었고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수사기관에도 이렇게 주장하고 소연도 이 논리로 설득하겠습니다."

 "알았네, 소연이 불러서 식사하고 가게. 아 그리고 내가 그 친구 이름 뭐더라, 진풍인가. 연락이 왔던데."

 "아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해결했어요."

 성열은 미소 지었다. 장인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집에 도착한 소연을 본 상무는 평소처럼 식사와 대화를 나눴다. 셋은 화기애애했다. 소연은 성열의 일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낼까 궁금했다. 상무는 끝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성열은 소연을 어렵지 않게 설득했다. 소연도 성열을 믿기로 했다.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상무의 집에서 나온 둘은 와인바로 들어갔다.     



 8     


 진풍은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자 전화기를 들었다. 주미의 번호를 눌렀다.

 "주무관님. 진풍입니다. 용기를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죄송해요. 저도 몇 년을 악몽 속에 살다 작년에 결혼하고 겨우 안정을 찾았어요."

 주미가 거절하자 진풍은 다른 피해자들을 수소문했다. 10여 명의 피해자에게 연락했으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상일은 피해자들이 더 나서지 않는다면 민주의 피해사실을 고소로, 주미 등 나머지 피해자는 고발로 처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소장 작성이 끝났어요. 접수는 언제 하면 될까요?"

 "곧 해야죠. 진풍 선배랑 상의해 알려드릴게요. 수임료는 얼마나 드려야 하나요?"

 "아니에요. 제가 정의감에 하는 일이니, 그런 말씀 마세요."

 상일은 섭섭했다. 골프를 치러 갈 때 민주를 소개받는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민주의 분위기와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은 점점 커졌다. 민주에게 사건 의뢰가 오자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뻤다.

 민주는 전화를 끊기 전 상일에게 진풍의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다. 일정을 상의해야 했다. 진풍은 회복 속도가 빨랐다. 민주와 상일이 병실에 오자 진풍은 시간계획을 말했다.

 "4월 16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바로 경찰청에 고소장 접수합시다."

 민주는 현수막 제작을 준비하고, 진풍은 기자회견문과 보도자료를 작성해 기자들과 시민단체 등에 배포하기로 했다. 상일이 피해자들을 마지막까지 설득해 보기로 했다.     


<진실> 배민채 2023


 9


 4월 16일. 결혼식 하객을 맞는 성열은 당당했다. 정관계, 재계, 언론계 등 많은 인파가 몰렸다. 기자회견을 결혼식과 같은 시간에 열린다. 성열은 기자회견 개최 소식을 미리 알았다. 진한이 성열에게 귀띔했다.

 기자회견장은 휑했다. 천제경제 차장과 금성방송 앵커가 결혼하는데, 장인이 칠성전자 상무다. 그래서 민주가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더 많았다. 일부 시민단체와 미디어비평 언론사 기자 등 참석자가 10명이 되지 않았다. 민주가 마이크를 들었다.

 "저는 10년 간 혜성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8년 전 성폭행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웠습니다. 왜 지금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지금이라도 그 추악한 인간을 막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민주는 성폭행이 벌어진 장소, 그날의 동선과 전후 상황을 설명했다. 성열이 그동안 보낸 문자메시지도 공개했다. 진풍은 기자회견문과 보도자료를 통해 민주 말고도 피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상일은 기자회견이 끝난 뒤 고소장을 접수한다며 서류봉투를 들어 보였다. 참석한 기자들은 공소시효, 범행 일시장소, 추가 피해자 등에 대해 물었다. 한 기자가 황당한 질문도 했다.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분이 특정될 것 같은데요. 기자회견 자체가 명예훼손 아닌가요? 아직 범죄 사실이 확인된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성열의 끄나풀인 모양이다. 상일이 나섰다.

 "명예훼손죄는 오로지 공익 목적으로 사실을 적시하면 위법성 조각사유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자회견은 법적 문제가 없습니다."

 민주는 상일이 든든하다고 느꼈다. 기자회견을 마친 뒤 민주와 상일은 고소장을 접수했고 진풍은 병원으로 돌아갔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10     


 성열은 폐백을 끝내고 피로연장으로 내려왔다. 잠시 뒤 기자회견장에서 명예훼손을 운운하던 기자가 왔다.

 "변호사가 보통 놈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쪽도 변호사 만나서 명예훼손이나 무고나 어떤 게 나은지 철저히 작전을 세워야 할 거 같아요."

 "그래, 고마워. 밥 먹고 있어 사람들 인사 좀 하고."

 성열은 장인에게 기자회견장 상황을 전달했다. 장인은 성열에게 ‘걱정 말라’고 속삭였다. 가득 찼던 피로연장에 손님이 다 돌아간 뒤 상무는 성열과 소연을 불렀다.

 "칠성그룹이 자랑하는 법무팀 변호사들과 얘기를 끝냈다. 유명한 법무법인에 사건을 맡길 생각이고 성폭행 사실을 허위로 꾸며 무고죄, 기자회견을 열고 허위사실을 배포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역고소할 계획이야. 걱정 말고 신혼여행들 잘 다녀와."

 성열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다녀와서 사건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연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성열을 바라봤다. 둘은 짐을 챙겨 리무진을 탔고 아까 그 기자가 수발을 들었다. 둘의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11


 기자회견의 울림은 분명했다. 민주는 유튜브 보도채널에 나가 심정을 토로했다. 일부 방송사와 인터뷰도 했다. 서울에 있는 일부 인터넷신문들이 민주 사건을 보도했다. 정작 지역언론은 침묵했다. 경쟁사지만 지역에서 함께 카르텔을 형성한 ‘깜보’를 지켜야 했다.

 칠성전자 상무가 움직였다. 법무법인 변호사들이 성열을 옹호하는 입장문을 배포하고 고소장을 접수했다.

 ‘성폭행이 일어난 장소에 간 적이 없다. 성폭행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다. 민주는 성열의 결혼식에 맞춰 허위사실로 돈을 뜯어내는 게 목적이다. 무고와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

 민주를 ‘꽃뱀’으로 둔갑시켰다. 상무는 칠성전자 출입기자들에게 입장문을 받아써달라고 부탁했다. 민주의 기자회견보다 성열의 입장문이 더 많이 보도됐다. 이 사건을 가십거리로 다룬 케이블방송은 민주를 의심했다. 여론은 성열에게 유리해졌다.

 진풍이 퇴원했다. 여론부터 잠재워야 했다. 경찰이 여론에 끌려 민주를 타깃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었다. 성열의 신혼여행 기간은 14일로 이제 7일 남았다. 진풍은 조급했다. 민주는 역풍을 보고 다시 겁을 집어먹었다. 민주를 향한 역풍은 내부에도 불었다. 진한이 다른 직원들을 이용해 ‘꽃뱀설’을 퍼트렸다. 민주가 출입하는 우주시청 공무원들도 시선이 바뀌었다. 그래도 민주가 인터뷰한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로 진실을 보도했다.     



 12


 성열은 즐거웠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엔나 공항 면세점에서 장인과 마실 술을 골랐다. 소연도 기분이 좋았다. 여행 내내 다툼 없이 지냈고 간간히 확인한 한국 소식이 성열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둘은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둘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결혼식장에서 제공한 리무진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성열을 건장한 남자들이 둘러쌌다. 경찰이었다. 성열은 수갑을 찼다.

 "성열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소연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아니 성열이 지금 입국하자마자 잡혀갔어. 어떻게 된 거야?"

 "뭐? 뭐라고? 기다려봐. 다시 전화할게."

 성열의 장인은 법무법인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 변호사는 범죄 피해자들 진술의 신빙성이 높아 체포 영장이 떨어졌다고 했다. 소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버리자. 혼인신고는 안 했지?"     



 13


 성열이 체포된 건 주미와 다른 피해자들이 나서서다. 방송사 파급력이 컸다. 주미는 민주가 나와 직접 인터뷰한 방송을 보고 용기를 냈다. 남편에게 말했고 남편은 이해했다. 남편이 되레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미를 설득했다. 주미는 알고 있는 공무원 피해자들에게 빨리 연락했다. 그들도 방송을 봤다.

 주미는 진풍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풍 기자님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성열을 신고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다른 피해자들도 연락해 함께 고소할 수 있어요."

 "아 늦지 않았을 겁니다. 신혼여행 갔다고 하니 그전에 신고하면 바로 체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풍은 상일에게 연락해 주미와 공무원 피해자들을 만나 고소장을 쓰도록 부탁했다. 진풍에게 또 전화가 걸려왔다. 스토킹과 성추행 피해를 호소했다. 혜성신문과 깜보를 맺은 신문사 수습기자였다. 그녀는 성열의 행위 때문에 6개월 수습기간을 견디지 못했고 고소하고 싶다고 했다. 주미와 공무원들, 다른 언론인까지 고소장이 접수되자 그제야 경찰도 사태 심각성을 인지했다.

 상일은 경찰이 체포 영장을 받았다고 민주에게 연락했다. 민주는 눈물을 흘렸다. 그놈을 처벌하는데 8년이 걸렸다. 아버지에게 성열을 벌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주 아버지는 그놈을 벌한 게 잘됐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진 게 못내 아쉬웠다. 그만큼 민주는 아버지에게 소중했다.     



 14


 성열이 체포되자 천체경제신문은 사과문을 냈다. 비난은 성열이 오랫동안 몸담은 혜성신문에도 쏟아졌다. 그러나 혜성신문 사장은 진한을 필두로 성열을 옹호했다. 되레 민주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냈다.

 ‘민주가 술에 취하면 남자들을 헛갈리게 한다. 그래서 남자들이 민주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장이 이런 소리를 안팎에서 떠들자 사장의 똘마니들이 그 말을 퍼뜨렸다. 성열이 체포 이후 구속되자 바깥에는 이런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혜성신문 안에는 이런 여론이 존재했다.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민주가 편안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민주는 진풍을 만났다.

 "선배, 아무래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진풍은 너무 놀라웠다. 민주와 함께 혜성신문에서 계속 근무하려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떠난다니, 허탈했다. 민주를 말리고 싶지만 그러지 않았다.

 "응? 회사를 그만둔다는 거야?"

 "네, 선배도 들었죠? 지금도 내가 꼬리 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있는 거? 근데 그 짓을 하는 게 사장이잖아요."

 "그건 성열이 재판이 끝나서 징역을 살면 사라질 거야."

 "사장이랑 그 사람들이 남아 있다면 사라지지 않을 걸요. 그리고 아버지도 은근히 나오길 바라는 거 같고요."

 완강한 민주를 진풍은 잡지 못했다. 진풍은 민주와 함께 커피숍을 나왔다. 상일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는 그 차를 타고 떠났다. 이틀 뒤 사장은 민주가 낸 사표를 수리했다. 혜성신문 사장과 그 똘마니들이 민주를 다시 할퀴는데, 민주는 버티지 못했다. 다행히 민주는 상일을 선물 받았다.



- 웹진 <숨 빗소리> 2023년 4월 발표


(세 번째 이야기 끝)



이창호 - 현직 기자. 책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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