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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Mar 23. 2024

어린 아재

VOL.14 / 2024. 3월호. 이창호 연재소설_3화

어린 아재

- 이창호




<제3화>



 발생



 지수는 터덜터덜 극장까지 걸어갔다. 집에서 10분이면 가는 길을 20분이나 걸었다. 극장 건물 1층부터 5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수의 심장은 고동쳤다.

 ‘아 오빠 너무 좋은데, 어떻게 얘기하지? 내가 몰래 훔쳐본 건 잘못한 일인데…’

 "띵∼"

 지수가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5층에 멈췄다. 지수는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자 다시 눈을 떴다.

 "짜잔∼"

 엘리베이터 문 앞에 태양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장미꽃 10송이가 들려 있었다. 태양은 지수에게 장미꽃을 내밀었다.

 "깜짝 놀랐지? 왜 눈을 감고 한숨을 쉬고 있어. 받으시오!"

 지수는 뭉클했다. 어젯밤 태양이 너무 미워서 잠을 설쳤다. 그런데 지금 자기 눈앞에 태양이 정말 사랑스럽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뭐야? 왜 여기 앞에 서 있어. 나 아니면 어떡하려고, 무슨 날이야 장미는 왜 샀어 아깝게."

 지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꽃을 받아 들었다. 태양은 머쓱했다.

 "아 꽃이 예뻐서, 주고 싶어서 사 왔지."

 태양은 웃으며 지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무슨 일 있었나? 쉽게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 사람인데.’

 어쩔 줄 몰라하는 태양을 보고 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쌤통이다, 날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 가만두지 않겠어.’

 지수는 자신 있게 먼저 치고 나갔다.

 "나 여고괴담 볼래, 그래도 되지?"

 "어 그럼, 나도 그거 보고 싶었어."

 태양이 표를 끊는 사이, 지수는 조용히 걸어가 팝콘과 콜라를 샀다. 태양은 머릿속이 심란했다.

 ‘아 왜 팝콘을 혼자 사러 가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싸늘하다.’

 음식을 사 온 지수는 태양의 손을 들어 자리를 확인했다.

 "가자."

 앞장서 걷는 지수를 태양이 쫓아갔다.

 잠시 뒤. 태양은 시종일관 비명을 질렀다. 지수에게 딱 붙어 머리카락을 커튼 삼아 스크린을 봤다, 안 봤다 했다. 지수는 태양의 꼴이 우스워, 웃음을 참느라 괴로울 지경이었다.

 "창피하니까 그만해.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 왜 그래. 사람들이 오빠 때문에 웃느라 집중을 못하잖아."

 "어 그래 알겠어."

 태양은 자세를 고쳐 잡고 영화에 몰입했다. 상영이 끝날 무렵, 태양의 어깨가 들썩였다. 지수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졌다.

 "오빠 울어? 크크크, 왜 이래 진짜… 하하하하하하하."

 "고등학생들이 슬프잖아… 흐흑 흐흑."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에 자막이 올라가자 지수가 태양에게 물었다.

 "그만 울고 내 얘기 잘 들어, 지금부터 대답 똑바로 해."

 "응? 뭔데?"

 "어젯밤에 어디 갔었어?"

 "어제 일찍 잔다고 했잖아."

 "한 번 더 기회 줄게, 제대로 말 안 하면 나 지금 그냥 간다."

 "진짜 일찍 잤어, 정말이야… 나 아직 얼굴에 베개자국 있는 거 안 보여?"

 "아 진짜, 이제 참말로 끝내자. 내가 어제 너 여자 만나는 거 봤어, 신나게 웃고 또 같이 눈물 흘리고 그러고 있더라."

 태양은 골목길에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아 어제 나 봤구나, 미안해… 사실 곧 다 말하려고 했어."

 지수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태양이라는 사람이 정말 좋지만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다면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수 없다. 태양이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야, 그 여자는…"


 생일 축하연에서 과음한 태양은 목이 말라 일어났다. 냉장고에는 물이 없었다. 태양은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 순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태양은 창밖을 확인했다. 한 남자가 아래층 쪽문에서 나와 두리번대고 있었다. 현관을 박차고 나간 태양은 난간을 뛰어넘었다. 대문까지 가려면 돌아가야 했다. 태양이 뛰어내리자 남자는 도망쳤다. 태양은 곧바로 남자를 추격했다. 아래층 여자는 달리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태양이 집으로 돌아왔다. 30분 간 추격전을 벌였지만 그 남자는 새벽 출근길 전철역 인파에 묻혀 사라졌다. 골목골목을 다 알고 있는 걸로 봐서 그 남자는 이 동네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래층 여자는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언덕에 지은 집이라 제가 뛰어내린 곳은 1.5층 높이예요."

 "다행이네요…"

 아래층 여자는 말을 더 하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통곡했다. 태양이 부축해 집 안으로 데리고 갔다. 집 안에는 아래층 여자의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멍하니 소파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태양이 아래층 여자를 부축하고 들어오자, 태양을 밀치고 아래층 여자를 안았다. 둘은 함께 울었다. 그 친구는 태양을 경계했다.

 "왜 진미를 안고 들어와요? 누구시죠!"

 당황한 태양은 말문이 막혔다. 진미가 나서 친구를 말렸다.

 "하진아 그러지 마… 저분이 방금 도망친 그 남자 쫓아가려고 2층에서 뛰어내렸어."

 "정말? 죄송해요…"

 하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울었다.

 "아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두 분 다 울고 계신지…"

 진미와 하진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둘이 어렵게 꺼낸 말에 태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그 남자가 하진을 성폭행하고 진미를 덮치려다 도망친 거라니. 태양은 분노가 치밀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현관문을 열어놓고 둘 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을 잡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꼭 잡아서 억울함을 풀어드릴게요. 경찰에 일단 신고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떡하실래요? 제가 대신해 드릴 수도 있어요."

 "그게… 제가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조심스럽네요. 남자친구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고요."

 하진이 망설였다. 태양은 진미라도 먼저 신고하자고 설득했고 두 사람이 다시 한번 대화해서 결정하라고 집으로 돌아왔다. 긴장했는지 태양도 씻고 나와 바로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태양은 계속 그 남자를 쫓았다.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모자 아래 얼굴에 마치 태양을 비웃는 것처럼 보여 화가 났지만 잡지 못하고 깼다. 오후 1시였다.

 태양은 밖으로 나가 아까 그 남자를 쫓던 길을 다시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진미네 집으로 걸어왔고 담벼락, 현관, 창문 등을 잘 살펴봤다. 변호사 시절 반지하에 살던 여자를 창문 사이로 훔쳐본 지방의원을 고소해 응당한 처벌을 받게 했다. 그 사건과 경중은 다르지만 그때처럼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그 의원은 거리와 동네에서 그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렇게 집이 어딘지 알아냈다. 이 동네에 살던 사람이 근처로 이사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태양은 인근마을까지 살펴봤다.

 태양은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왔다. 진미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요. 그 사람 잡는 걸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건가요? 대학생이잖아요?"

 "아 지금… 그러니까 대학생이 맞는데요. 제가 사실 변호사 자격증이 있어요, 아니… 자격증을 아마 매우 딸 거라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태양의 말에 둘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양이 말을 더했다.

 "제가 지금 학교에서 모의법정이라고 실습하는 게 있어요, 거기서 제가 변호사를 맡았는데… 사건이 지금이랑 비슷하거든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진미는 태양의 말을 진짜 믿었다. 태양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법대 1학년 교육과정에는 실습이 없어서다.

 "하진이는 설득 못했어요, 저만 먼저 신고할게요.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이따 일 끝나고 전화드릴게요."

 둘은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밤 10시께 진미가 태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일 마치는 곳 근처 카페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집 근처로 혼자 가기가 두렵네요."

 "네 어딘지 설명해 주세요."

 진미의 설명을 들은 태양은 께름칙했다. 장소가 지수네 집 근처였다. 태양의 느낌은 적중했다. 지수가 진미를 만나는 태양을 목격했으니.


 "이제 이해했지? 내가 왜 일찍 잔다고 하고 거기 갔는지?"

 "나 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그리고 오빠가 무슨 수로 그걸 해결해? 위험하니까 나서지 마."

 "경찰에 신고하는 것까지만 도와줄게."

 "아… 맘에 안 드는데, 딱 거기까지만이야. 그리고 그 여자 만날 때 웃지 마!"



<다음화에 계속>



<숨 빗소리_ 이창호 소설>


이창호 - 현직 기자. 책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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