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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Mar 30. 2024

누구나 한 번쯤은 문학소녀로 살잖아요 2

VOL.14 / 2024. 3월호. 눈꽃의 에세이_12

누구나 한 번쯤은 문학소녀(?)로 살잖아요 (제2편)     

- 눈꽃



 문학소녀로 살았던 그 시절을 회상해 보니 새삼 생각나는 것들이 꽤 많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의 추억들은 잊은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첫사랑의 기억처럼...


 나의 외갓집은 경상북도 안동이다. 지금은 도로가 잘 닦여 있어 차로 세 시간 남짓이면 안동에 갈 수 있지만, 어릴 때에는 차로 다섯 시간은 넘게 가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명절날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외갓집을 갈 때면 나는 뒷자리에서 몸을 비비 꼬며 “아직 멀었어?”라고 연신 묻곤 했다. 엄마는 “거의 다왔다.”고 처음에는 친절하게 답해주다가 그 질문이 한 열 번쯤 반복되자 나중엔 “그래! 아직 멀었다!” 고  소리를 지르셨다. 난 그 대답을 들으면 안도했다. 엄마가 성을 내면 진짜 곧 도착한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런 멀고 먼 외갓집을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혼자 가기 시작했다. 집을 떠나 혼자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낯선 곳에 홀로 가는 것은 무섭고 또 집에서 허락을 해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방학 때 외갓집을 가는 건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고, 비교적 쉽게 느껴 볼 수 있는 유사 일탈(?)의 여정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안동 가는 기차에 올라타면 알 수 없는 고독감에 휩싸여 코끝이 시큰해졌다가도 금방 짜릿한 해방감에 마음이 달떴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비둘기호나 통일호처럼 느려터진 완행열차에 올라타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외갓집에 놀러 가는 여고생이 아닌, 연인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홀로 기차에 몸을 실은 여인처럼 마음은 곧 처연하고 센치해졌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로 설레기까지.

 영화에서 보면 여행 중 기차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사랑을 싹 틔우고 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역시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보고 웃어주는 사람은 간식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홍익회 아저씨뿐이다. (그때는 기차에서 간식도 팔고 그랬어요ㅎ) 지금은 기차나 버스에 앉은 옆 사람과 만난 지 10분 만에 급 친해져서 몇 시간씩 폭풍 수다를 떨 만큼 아줌마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낯가림이 심한 여고생이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식당칸에서 보냈다. 식당칸은 창을 보고 앉을 수 있게 테이블이 되어 있어서 무언가를 끄적이거나 혼자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마치 내가 가는 곳이 외갓집이 아닌 저 먼 지구의 끝이라도 되는 냥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과몰입하여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그리움이 조롱조롱 달린 일기를 적었다. 그땐 열여덟이었으니까.

 ‘정신 고향의 수도’ 작은 소도시에 왜 이렇게 거창한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동은 예로부터 양반의 도시로 일컬어졌다. 지금 시대에 무슨 반상의 차이가 있을까마는 안동이라는 도시에 가보면 그 시절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외갓집에서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나와 일곱 살 차이 밖에 안나는 막내 이모방을 썼다. 난 그 작은 방을 좋아했다. 이모의 낡은 책상 옆쪽에는 할머니가 옛날부터 쓰던 오래된 미싱이 있었다. 발로 오래된 미싱 페달을 밟으면서 옷을 만드시던 할머니 모습에서는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낡은 장롱 한쪽 거울에는 그 당시 이모가 좋아했던 강석우나 성룡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고, 책장에는 이모가 읽던 오래된 영화나 음악잡지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난 밤마다 온돌에 배를 대고 엎드려서 이모의 책들을 뒤적이거나 글을 썼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이모의 책에서 첫사랑을 연상시키는 사람에게 쓴 편지나 메모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마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들일 것이다. 내가 아는 왈가닥 이모가 쓴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애절하고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편지였다. 그 후로 이모 얼굴을 볼 때마다 이모의 비밀을 훔쳐보았다는 죄책감과 함께, 인간에겐 늘 가까운 가족이어도 알지 못하는 내면의 아픔이 있다는 깨달음이 되살아나곤 했다.

 낯선 곳에서의 밤은 길다. 고독하고 쓸쓸할수록 난 그 감정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자정부터 시작되는 영화음악 프로를 들으면서 새벽까지 받을 사람도 없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할머니는 내가 있는 동안 밖에 나가서 영화도 보고 시내 구경도 하라고 매일 용돈을 주셨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나면 혼자 시장 구경을 갔다. 양반의 도시라는 게 무색하게 안동 사람들의 사투리는 억양이 강해서 꼭 시비를 걸거나 싸움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대화 나누는 그들의 표정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듣는다면 진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싸움이 난 줄 알고 구경을 갔는데 서로 물건을 하나라도 더 담아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따뜻한(?) 풍경이었다.

 시장을 어슬렁거리다 심심하면 동시 상영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홍콩의 b급 영화 두 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 홀로 앉아 어둠에 몸을 파묻고 커다란 극장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났다.

 매일 나와서 시장을 한 바퀴 돌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출출해지면 시내에서 꽤 규모가 있는 m제과점에 들어가서 빵을 먹었다. 그때 내가 입고 갔던 코트는 누가 보기에도 눈에 띄는 빨간색 하프 코트였다. (피부가 까만 엄마는 평소 자신이 입지 못하는 원색의 옷들을 넌 피부가 얘서 괜찮다며 과하게 내게 입히셨다) 거의 같은 시간대에 일주일째 가게에 오는 빨간 코트의 소녀. 거기다가 내가 쓰는 서울 말씨는 사투리 천지인 그곳에서 아주 이질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일주일쯤 지나자 사람들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가면 반가움과 호기심 그 어디쯤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그 빵집을 계속 간 건 거기 아르바이트생이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영화 보디가드의 남자 주인공 캐빈 코스트너와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그 아르바이트생이 내게 주문을 받으러 왔다. 훤칠한 키와 서구적 외모의 그가 내 앞에 물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뭐 드시껴?”

 “네?”

 “뭐 드시껴~~~~?”

 무얼 먹겠냐는 안동 사투리가 그의 외모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빵 터졌다. 역시 인간에겐 적절한 거리 조절이 필요하다.


 내가 외가에 갈 때는 거의 겨울방학이었기 때문에 다른 계절의 안동은 내 기억 속에 별로 없다. 겨울의 스산하고 고즈넉한 풍경들만이 가득하다. 이곳에 오면 진짜 공부밖에 할 게 없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 눈 쌓인 도산서원의 돌계단들이며, 실제로 가보면 볼게 별로 없어서 깜짝 놀라는 하회마을의 양반가 집들은 지금쯤 어떻게 변했을까.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는 그렇게 길게 외갓집에 간 적이 없다. 나에겐 더 이상 마음의 고독을 되새김질해야 하는 감수성이 사라졌고, 그것보다 더 재밌는 수많은 것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모의 오래된 작은 방에서 끄적이던 잡문들과 낡은 라디오에게 들려오던 유재하나 김광석의 음악들, 그때 읽었던 책들이 나의 내면을 성장시켰던 것은 틀림없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렵고 싫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고 싶었던 그 양가적인 감정 어디쯤에 열여덞의 나는 있었던 것 같다.  MBTI검사를 하면 전형적인 T인 내가 F로 살았던 그리운 시절이여... 우리 모두 한때는 문학소녀로 살지 않았는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난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빨리 가서 엄마의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 할머니는 역시 음식 솜씨는 별로다... 안동 간고등어는 한번 먹을 때만 맛있다.’고     


여행은 자기 자신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대니 케이-     


*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문학도로의 좌절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술이 없이는 쓸 수가 없어 궁금하신 분들은 개인적으로 문의 바랍니다. 소주와 함께요.     


(열두 번째 에세이 끝)


<숨 빗소리_ 신작원고_ 눈꽃의 에세이>  


눈꽃 - 격(格)을 알아야 파격(破格)을 꿈꿀 수 있다고 믿는 인간애정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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