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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May 07. 2024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VOL.16 / 2024. 5월호. 인겐의 여행산문_14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 인겐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은 호주에 정착한 한국 청년이 자신의 오랜 목표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위한 다양한 준비과정, 실제 순례길 여행기를 매월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 연재합니다.



 까미노 형제들



 안녕 까미노 형제들. 나는 내가 까미노로 향하기 전이나 향하는 중에도 함께 걸어가는 누구를 만나 헤어지는 순간에 눈물을 흘릴 거라 예상한 적은 없었어. 물론 스쳐가는 인연들과 이야기나 밥 한 끼 정도는 하겠지 예상도 하고 기대하기도 했지만 말이야.

 사실 그날 아침에 50km를 걸어갈 생각에 정말 경황이 없었어. 가볍게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준비를 모두 마친 뒤 출발한 게 아마 아침 다섯 시 반일 거야. 아직은 모든 게 어두컴컴한 시간. 나는 주머니 속의 귤을 하나씩 까먹으면서 핸드폰 라이트에 의지해서 길을 나섰어. 스페인의 시골길은 마을을 벗어나면 가로등이 없잖아. 어디 위험한 게 없나 발만 보면서 걸어가다 마을 가로등을 만나면 그제서야 하늘을 좀 보면서, 오랜만에 보는 북반구 밤하늘은 호주의 밤하늘과 어떻게 다른지 관찰하곤 했지.


 

 그렇게 2시간? 대략 10km를 걸어가고 나니 해가 서서히 떠오르더라고. 커피 한 잔 더 하면서 여자친구에게 전화하러 가까운 바르 ‘알 파하로’에 갔지. 커피 한 잔을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니까 너희가 들어오더라. 그땐 뭐 여자친구랑 통화하느라 바빠서, 그냥 너희를 스쳐 지나갔지. 부르고스 대성당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너희를 또 봤는데 역시 또 한 번 스쳐 지나갔잖아. 하지만 어쩌면 인연이란 게 생각보다 강력한 것인지도 몰라. 내가 물집 때문에 하루 연박을 하기로 한 사하훈에서 너희를 다시 한번 만나 같이 밥을 먹고 그 넓은 다락방 알베르게에서 우리 셋이 머물렀으니까.



 너희들을 만나서 정말 어려운 도전으로 가득했던 내 산티아고 일정이 매 순간 웃음으로 가득했었던 것 같다. 성공해 내겠다는 처음에의 자신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온데간데없어졌지.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에 휩싸인 순간, 일단 걷기 시작했고 그런 내 옆에 어김없이 너희들이 있어서 실없는 농담과 웃음으로 어두운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어.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하는 시간들이 하나하나 쌓이고, 점차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족이 되었지 않나 싶다. 저녁마다 가까운 슈퍼에서 주섬주섬 있는 대로 사다가 만든 요리 위로 맥주를 부딪히며 외쳤던 ‘땡고 암부레 ('배가 고프다'는 스페인 말)’. 산 정상 위 바르에서 냉동실에서 꺼낸 얼음잔에 마시던 맥주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라고, 우리는 행복이 따로 없다고 함께 외쳤다. 하루는 어느 한 명이 발이 그날 심하게 아파서 뒤쳐지고 있었지. 그때마다 기다려 우리는 밥과 간식을 함께 먹었다. 폰세바돈을 내려오던 날을 기억하니? 가방을 동키(가방배송 서비스)에 맡기고는 50km를 넘게 걸어서 앞서있는 나를 따라잡겠다고, 같이 저녁 먹자고 했던 것. 너네 결국은 걷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 내가 알베르게 사장님하고 같이 차를 타고 마을 앞 주유소 겸 호텔로 너희를 데리러 갔지. 그때 너희랑 같이 산을 내려온 강아지 '럭키'는 지금도 순례자들을 인도하면서 누군가의 '럭키'로 함께 다니고 있을까?



 비야당가스 알베르게에서 묵던 날 저녁, 내 발은 염증으로 너무 심하게 부어있었어. 과연 다음날 걸을 수 있을까, 병원을 알아보고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었지. 포르토마린으로 가던 비 오는 날, 피가 가득 찬 물집을 처치하는 길 위에서도 너희들은 나를 기다려 주었지. 피와 고름이 계속 나오는 발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해 준 건 계속 먹던 진통제가 아니라 옆에서 힘이 되어준 너희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를 떠나는 순간까지도 공항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려는 내게 배고프면 먹으라고 빵과 음료를 선뜻 사서 나눠주고, 버스비 하라고 주머니에 지폐를 넣어주던 너희들이었어. 신기하지? 하루 평균 40km를 걷는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오히려 나눌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산티아고 공항 구석에 있는 순례길 이정표를 보면서, 곧 있으면 어머니를 만난다는 설렘도 잠시 잊은 채 잠깐 감상에 빠져본다. 내게 산티아고는 곧 너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이제 본래의 각자 삶으로 돌아가면 나는 호주로, 너희는 독일로, 언제 다시 보자고 기약하기는 어렵겠지. 우선은 숨 가쁘게 일정을 달리느라 엉망이 된 몸부터 잘 추스르자. 그리고 언제고 다시 만날 계획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너무 좋을 것 같다. 진선아, 지훈아,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해라. 다시 한번 너무 고맙다. 보고 싶다 친구들아.



<숨 빗소리_ 신작원고_인겐의 여행 산문>


인겐 - 남반구 하늘 아래 인생 개척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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