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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Jun 16. 2024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VOL.17 / 2024. 6월호. 인겐의 여행산문_15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 인겐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은 호주에 정착한 한국 청년이 자신의 오랜 목표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위한 다양한 준비과정, 실제 순례길 여행기를 매월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 연재합니다.



 선배님들!!


 살다 보면 종종 산티아고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대부분은 얼마나 좋았는지를 설명하느라 바쁘지만, 그럴 때마다 선배님들이 종종 생각납니다. 제 800km 여정 동안 잠깐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신 선배님들이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뻔한 새 지저귐마저 황홀한 노래처럼 들리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여정을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곤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반나절을 함께 걸었던 70세 의사 선배님, 기억하시나요? 제가 "따님과 함께 하시는데, 왜 사모님께서는 같이 오지 않으셨냐고, 같이 가자고 말씀 안 해보셨나요?"라고 물었을 때, 선배님 표정이 굳어지셨죠. 따님은 콧바람 참는 듯 입에서 코로 넘어가는 숨을 참으셨고요.

 그때 선배님이 "이런 곳은 아내랑 오는 게 아니라고, 이런 여정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고 가기에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같이 오자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선배님! 저는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따님은 할 말은 많으시지만 하지 않겠다는 눈치였지만요.


 우리 이름을 까먹은 순례객이자 인생의 에스파뇰 선배님들!

 늦으면 현관문 열쇠고리를 바꾼다던 아내분에게 쫓겨나지 않고 잘 지내고 계시죠? 배우자 눈치를 보는 건 스페인이나 한국이나 호주나 다 마찬가지인가 봐요. 남자들끼리 떠나는 여행이라도 순례길은 아내분들이 군말 없이 보내주니까 일부러 하루하루 짧은 거리만 걸으면서 여정을 즐기는 선배님들! 그렇게 조금씩만 걸어야 이번에 끝내지 못한 길들을 다음에 또 걸으러 나오신다고요? 형수님들께는 순례길보다 좋은 남자들끼리의 여행 이유는 없잖아요, 그죠? 점심에 해가 따갑기 전까지만 걷고 이후에는 시원한 맥주 한잔 하면서 마을 구경하고 쉬는 것이 선배님들에게 진정한 휴가 아닐까요?



 이제 막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혼을 즐기는 친구 성진아! 너의 순례길은 여정의 중간에 너의 짝과 재회하여 함께 완성해 나가는 특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든 순례객들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고, 주변에 늘 이정표가 그 길을 가리키잖아. 너에겐 모든 이정표가 너의 짝을 향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공통된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면, 각자 다른 길에 오른다. 그러나, 결국 돌아가는 곳은 "집"이다. 순례길에 오르는 날, 살던 집을 정리하고 짐을 들고 나와서 이곳저곳에 짐을 부탁했다. 돌아갈 집이 없던 나는 내 짝에게로, 마중 나온 내 짝을 만나, 내 짝이 머물던 곳으로 향했다. 마치 마일스톤처럼, 순례길을 기점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산티아고 순례자들에게 안녕을, 그리고 그런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모든 사람들에게도 심심한 안부를 전합니다.



<숨 빗소리_ 신작원고_인겐의 여행 산문>


인겐 - 남반구 하늘 아래 인생 개척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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