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 빗소리 Jun 08. 2024

지금의 노래

VOL.17 / 2024. 6월호. 시로 쓴 이야기_8

지금의 노래          


                   

 바다가 보이는 코타키나발루의 9층 객실 창가에 서서 그녀는 말했다.

 “일 년 만에 결국 왔네. 아,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 곳이었는데도.”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었다. 그녀는 사회초년생이었고, 나는 연거푸 시험에서 떨어지던 고시생이었다. 나는 그 여행을 가기 전까지,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그녀가 왜 아무런 직업도 없는 나를 선택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뜨겁지만 변함없이 가난한 연애 생활을 이어가던 나날 중 그녀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여행을 위한 통장 하나를 만들자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매달 오만 원, 직장인인 그녀는 매달 십만 원씩 모아서 같이 해외여행을 가보자고. 그때까지 나는 해외는 고사하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도 한 번 가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 왜 하필 그곳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세계 3대 석양 명소인 그곳에 가서 그 유명한 블루 선셋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일 년 동안 돈을 모아 마침내 우리는 3박 4일 일정의 목적지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저녁마다 말도 안 되는 빗줄기들이 쏟아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첫째 날도, 둘째 날도. 금세 비가 그칠 것이라는 현지의 일기예보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셋째 날 저녁마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해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호텔 숙소 창가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한인마트에서 사 온 타이거 맥주를 마셨다. 코타키나발루를 목적지로 정한 이유가 아름다운 선셋을 보기 위함이었기에 내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곳에 오자고 한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더 자세히 바라보기 위해 창가 가까이 다가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비치기까지 했다.

 “석양 명소에서 비만 구경하다가 가는데, 별로 아쉬워하는 거 같지 않네?”

 “조금 아쉽긴 하지. 그래도 괜찮아. 매 순간 이렇게 몰입하고 있으니까.”

 “몰입?”

 “자기랑 어렵게 돈 모아서 함께 이곳에 왔고, 선셋은 못 봤지만, 이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아쉬움과 빗줄기들을 선명히 바라보고 있잖아. 분명 십 년이 지나면 오늘의 아쉬움들도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거야.”

 그녀는 캔맥주를 두 캔째 마시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가 연인이 되기 일 년 전, 편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암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암의 위치가 좋지 않아서 쉽게 수술을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항암 치료만 겨우 받는 정도였지만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몇 년 사이, 어머니의 증세는 갑자기 악화됐다.            

 “엄마가 그날 아침 피를 토하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동안, 그 차에서 나눴던 대화가 엄마와 나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만은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여러 가지 말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힘없이 웃으면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 몇 년 만에 아버지 친구로부터 한 번 만나보자고 고백을 받았었는데 연애를 한 번 해볼 걸 거절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오냐고 그녀는 울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을 병을 핑계로 보러 떠나지 않은 것도 아쉽다고 했다. 매 순간 그냥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온 것 같아서 그게 후회된다고.

 너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암이 악화된 것도 일상의 더 소중한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생각했단다. 암이 더 악화되면 어쩌지, 암 다 치료하면 하자, 그런 생각들이 삶의 어둠을 더 키워낸 것은 아닌지,라고. 그러면서 너는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말했단다. 매 순간 몰입하고, 그러면서 여유를 가지라고. 어쩌면 그게 삶에 밀려오는 어둠과 긴장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들을 잇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천천히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마지막일지 예상하지 못한, 어머니와의 잊을 수 없는 그 대화가 이후 그녀의 삶에 새로운 방향키가 되었다.

 “실망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소중한 사람과 이렇게 이국의 빗방울을 구경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말이야.”

 우리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에서 처음 만났었다. 당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손님이 뜸한 시간이면 카운터 의자에 앉아 류시화의 잠언 시집을 읽곤 했다.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녀는 한때 소설가를 꿈꾸던 문창과 출신이었다. 이후로 부러 님이 뜸한 시간에 그녀가 편의점을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처음에 자기 나이 듣고 뜨악했잖아. 너무 어려서.”

 “별로 그렇게 놀라 하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뭐, 그렇게 큰 장애물은 아니었어. 그 순간의 내 맘이 더 중요해서. 호호. 결국 우리 엄마의 마지막 조언이 우리를 연결해 준 걸지도 몰라.”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는 일 년을 더 사귀다가 헤어졌다. 물론 그것도 다 그녀의 망설임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그래도 나와 그녀는 우리가 사귀는 그 이 년 동안 뜨겁게 서로에게 집중했고 사랑했다. 그녀가 떠난 후 삼 년 간 나 역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 사이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한편으론 소중한 기억을 언어로 남기기 위해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녀에게 우리 이야기가 담긴 나의 첫 시집을 선물로 꼭 주고 싶었다. 이를 테면 이런 시들이 담긴 시집을.          



시간의 내음*         

           


 캄캄한 먼지 같은 시간들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을  

         

 작은 디퓨저 하나

 안개꽃 조화 몇 송이를

 그 안에 꽂아 넣고

 문을 열자마자 맞이하는 책장 위에 올려놓았지      

   

 조금씩 향이 퍼져나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조금씩

 아름다운 향은 사라져 가는 것이겠지          


 공중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는 모래시계처럼

 문득 쳐다보면

 그만큼의 시간이 창밖 저 멀리 스쳐갔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내음은

 이전에의 내음을 지운다          


 아니 온전히 그것을 지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시간들은

 나의 과거를 지웠다기보다

 아주 잠시 망각케 해 주어서     

     

 나는 그 시절 동안 누구보다

 이 작고 가난한 방에서 당신과 파도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시간들을 기다리며 삶에 집중했다. 외로움과 우울감이 밀려올 때마다 일상에 더 몰입하려고 애썼다. 바쁘게 살면서도 긴장하지 않고 여유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녀처럼.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그녀의 삶의 방향처럼. 나는 결국 그녀를 다시 만나 나의 첫 시집을 그 두 손에 건네줄 수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우리를 위한 시들도.

 그리고 그 부족한 문장들은 다시 우리를 이어주었다. 그녀에게 남긴 그녀 어머니의 소중한 말들이 여전히 그 둘을 잇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사랑하게 됐다. 두 번째의 사랑. 마치 두 번째의 인생을 살아가듯이. 매 순간 여유와 몰입을 즐기면서. 우리의 시들은 여전히 지금도, 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쓰이는 중이다. 두 번째 우리만의 시집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 삽입 시,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중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 아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