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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운 Mar 08. 2023

#5. 텅장이 되어도 행복한 일을 마주한다면

20대 직장인이 독립서점을 열기까지

마음에 꼭 들어맞는 틀을 찾았으니, 이제는 그 내용물을 채워갈 차례이다. 


요즘엔 카페처럼 인테리어가 멋진 서점도 많고, 실제로 커피도 같이 하는 곳도 많으며, 다양한 굿즈와 문구류 등 잡화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서점도 있다. 그러나 결국 서점의 정체성은 그 서점이 큐레이팅하는 책의 분위기가 만들어주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서점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는 인테리어도, 컨셉도, 굿즈도 아닌 바로 책뿐이다(난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서점을 준비하며 제일 고심한 부분 역시 '어떤 책을 들여와서 소개할까'였다.


난 3.8kg의 여자아기 우량아로 태어났다. 누구나 한번쯤 해본다는 '어릴 때 00을 안 먹고 편식해서 엄마한테 혼났다' 따위의 스토리는 생성될 틈도 주지 않았을 만큼 모든 걸 고루 잘 먹고 또 많이 먹었다. 덕분에 모태 유전자를 잘 보존하여 이제는 우량어른으로 잘 자라버린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상당히 잡식성 인간이라는 것을 어필하고자 함을 위하여 깔은 복선이다.


그런 내가 책에 대해서는 편식을 하는 편이라, 책방지기로서는 참 안타까운 특성이 아닐 수 없다.

난 직접적으로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해 주려는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100일 안에 부자 되기, 창업의 신으로 거듭나는 법, 주식할 땐 이 책 하나면 끝... 과 같은 류의 적극적인 일타강사 같은 책은 어쩐지 손이 잘 가지를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일상에서 마주한 순간을 공유하며 자신이 사유한 바를 자연스레 건네는 친구 같은 책을 좋아한다. 


일타 강사의 이야기라면 받아 적어야 할 것만 같고,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음 전문가니까 내가 틀리고 그가 맞겠지!' 하며 헥헥대고 쫓아가야만 할 것 같다. 

친구의 이야기는 편안히 소파에 기대서 듣더라도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듣던 날의 날씨나 냄새까지도 잔상이 오래 남으며,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며 유의미한 핑퐁도 밤새 칠 수 있다.


누군가의 삶을 자연스레 노출시키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일기처럼 꺼내는 책들, 그래서 사람들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게 만드는 그런 책들 위주로 들여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책 잘 팔릴까? 하는 책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내가 당기는, 내 취향의 책들을 잔뜩 고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CEO마냥 당당히 고개가 쳐들어지고, 마음은 넉넉해지는 것이었다.


신나서 장바구니에 이 책, 저 책, 그 책 시리즈 등 잔뜩 담았더니 약 100권이 담겼다.

내 생에 100권의 책을 한 번에 담아보는 경험을 하다니. 비단 책뿐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한 번에 100개를 사본 적은 없다. 돈도 돈이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100권 중에는 그 어떤 것도 뺄 수가 없었다. 아 이 책은 내가 진짜 좋아하지, 이 책은 추천받았단 말이야, 이 책은 표지가 너무 내 스타일이잖아... 구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한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책을 '입고' 했다. 책을 우리 서점으로 모셔오는 일, 그 단계를 드디어 해본 것이다. 내가 하나하나 골라온 책들을 어떤 스타일로 배치할지, 정말 사람들이 사줄지... 수많은 상념이 오가고 통장은 비어갔지만 폴짝폴짝 뛰는 가슴에 밤에 침대에 누워서도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텅장이 되어도 마냥 행복한 일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중학생 때 좋아하는 일본 아이돌의 오만가지 굿즈를 사기 위해, 용돈을 쪼개고 또 쪼개 모아서 앨범 한 장 사고, 포스터 한 장 사고 그럴 때였다.

이때의 '미친듯한 덕력'은 오직 중학생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성인인 나는 다시는 그때의 열정을 가질 수 없으리라. 그러나 책을 고르면서, 잠시나마 그때만큼의 순수한 행복을 회상할 수 있었다.


아, 나 조금 행복하구나-라고 뒤늦게 느꼈지만 말이다.


잔뜩 쌓인 새 책을 보는 것만으로 엔돌핀 급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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