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
최근 나는 내가 집에서는 생산적인 활동이라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했다. 나는 살면서 총 네 군데의 '집'을 경험해 보았는데, 한국의 본가 아파트, 교환학생 시절 살던 플랫 쉐어 형태의 스튜던트 하우스, 처음 여기에 왔을 때에 구했던 원룸과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그것이다. 그래도 더 많은 집을 경험해 보아야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나는 집에서, 내가 자고 먹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성공적으로 해본 일이 별로 없다. 재택근무를 해야 할 때는 카페에 자주 갔다. 회사에서 구독하는 네트워크 시큐리티 프로그램을 켜고 일했다. 책을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은 당연하게 할 수 있지만,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는 것조차 집에서는 쉽지 않다. 본가에 살 때는 나만의 공간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고, 원룸에 살 때는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현재 집에까지 살아보니 역시나 그렇다. 애석하게도 나는 '자기만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좋다. 집은 나에게 안도감과 족쇄에 묶인 듯한 감각을 동시에 제공한다. 익숙한 집기와 가구, 딱히 인테리어에 공들이지 않았지만 자연히 선반과 침대 맡에 자리잡은 소품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이 한결같음과 매일의 변화를 동시에 갖고 있을 때 느껴지는 애수... 그 모든 것이 집에는 있다.
이 집에는 큰 식탁이 있고 의자는 네 개가 있다. 세트로 맞춘 적이 없는 듯, 네 의자는 모두 다르게 생겼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는 비교적 현대적인 것으로 검은 색이며 등받이와 팔걸이가 둥근 형태로 이어져 편하게 감싸주기 때문에 방석도 깔려 있지 않은 의자 치고는 정말 편하다. 이케아 제품이라고 쓰여 있는데 홈페이지에서 같은 모델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애석하게도 단종된 모양이다. 한편 내 건너편에 놓인 의자는 앉으면 앞뒤로 들썩들썩거리는, 썩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의자다. 고딕인지 바로크인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현대적인 모양새는 아닌 나무 의자와 접을 수 있지만 그닥 편하지 않은 낮은 의자 하나까지 총 네 개의 의자가 (역시 이케아 것임이 분명한) 다이닝 테이블을 지키고 있다. 나는 어제 저녁을 먹다가, 이 의자들을 각각 다른 사람이 사온 것은 아닐지, 각자의 취향과 사정에 의해 제멋대로 고른 의자들이 식사라는 목적을 위해 모두 함께 여기 모이게 된 것은 아닐지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상상력에 도취하여 그 생각을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한때는 파티를 즐긴 듯 찬장에는 안 쓰는 그릇과 일회용 플라스틱 컵 스택이 들어 있다. 나는 쓰지 않는 커피 머신과 토스터, 물 끓이는 포트와 아주 가끔 사용하는 전자레인지. 4구의 인덕션은 요리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것 같지만 식기는 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나는 포크 하나, 숟가락 하나, 나무 수저 세트 한 벌이면은 충분하다. 식탁에는 이케아에서 사 온 테이블 매트를 두었다. 딱히 필요한 물건인 것 같지는 않으나, 노란색이라서 기분이 밝아진다. 주방 옆으로 난 창문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다섯 개나 있다. 겨울도 반절이 지났는데 그들 중 아무도 완전히 죽지 않았다. 조금 시들고 잎 몇개를 내주었을 뿐 여전히 초록색을 유지하고 있다. 무슨 식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파리는 동그랗고 뼈대는 강인하다. 반면 내가 가져온 몬스테라는 생명력을 75퍼센트 이상 잃은 것을 보며 이게 내 잘못인지 태생부터가 그러한 것인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 둘 다면 좋겠다. 오롯이 전자면 좀 죄책감이 드니까.
거실에는 긴 소파가 있다. 소파베드도 되는 거라 필요하면 펼쳐서 잘 수 있다. 나는 펼치지 않고도 들어가는 정도의 크기다. 쿠션은 딱 한 개, 담요 하나. 거실에 깔린 러그는 내 취향이 아니다. 사실 나는 거실에 러그 까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위에는 나무 탁자가 있다. 내 일기장, 크로스워드 책, 펜 몇 개, 티브이 리모컨이 놓여 있고 가끔은 먹다 만 과자가 앉았다 간다. 거실 천장 조명은 필연적으로 어두워서 창가 바로 옆에 스탠딩 조명이 하나 더 있다. 이럴 거면 밝기 조절이 더 자유로운 것으로 하나만 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거실 벽에는 크고 작은 선반들이 벽에 걸려 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책과 런던에서 사 온 2층 버스 레고와 부적처럼 들고 다닌 투슬리스 인형을 놓아두었다. 집 열쇠, 유산균, 립밤, 애플워치 같은 것들은 비교적 낮은 선반 위에 있다. 거실 한 구석에는 작은 책상이 하나 있는데, 사실 꽤 신기하게 생긴 형태로, 접으면 수납장으로 쓸 수 있고 펼치면 책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상이 보통 그렇듯 오래 앉아 있을만한 책상은 못 된다. 나는 늘 길이 조절이 되는 좋은 책상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는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은밀한 꿈은 1인 오피스를 갖는 것이다.
침실에는 매트리스가 두 개나 있다. 나는 오른쪽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고 왼쪽 매트리스는 늘 비어 있다. 행거에는 셔츠들을 걸어놓았다. 본가로 돌아가면 옷의 대부분을 기부하거나 버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필요한 옷이 몇 벌 없다. 이제 그런 것에는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다. 침실에는 책장 비슷한 것이 놓여 있는데, 이것을 나는 그냥 선반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말로 아무 것이나 놓아뒀다.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이동 가능한 작은 서랍장 위에 하느님 사진과 립밤, 핸드크림, 물컵을 놔둔다. 겨울엔 목이 건조해져서 자기 전에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침대 옆에 둔다. 엄마 아빠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늘 내 방에 물을 떠서 놔주곤 했다. 덕분에 나도 나를 그렇게 챙길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침실 안쪽에는 아주 작은 옷방이 있다. 나는 옷이 별로 없어서 이 옷방도 거의 채우지 않았다. 여기서 더 버리고 싶은 옷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현관이다. 화장실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이다. 꽤 넓고, 이곳에서는 드물게도 욕조까지 있다. 역시 이케아 제품인 이동형 물건 수납장에 화장품과 휴지, 헤어 드라이기를 넣어 뒀다. 더 큰 조립식 수납장에는 샤워할 때 옷을 벗어두거나 세탁 거리를 쌓아둔다. 수건은 딱 두 장이면 충분하다. 현관은 움푹하게 들어가 신발을 벗어둘 수 있는 곳이 따로 없지만 옷을 걸어두는 곳은 있다. 장갑, 목도리, 바라클라바, 경량 패딩, 젖은 코트 같은 것을 걸어둔다. 재활용 쓰레기와 장바구니, 우산도 여기에 걸어둔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전신거울이 있다. 이 거울을 좀 더 누렸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이런 생각은 마지막에 가까워서야 드는 법이다.
이 집은 내가 나로서 달라질 수 있었던 첫 집이었다. 그렇기에 꼼꼼히 기록해둔다. 항상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필연적으로 나쁜 기억이 깃들 수밖에 없는 곳. 그러나 좋은 기억을 만들 힘도 주는 곳. 이 집이, 이 도시가 내게 어느새 집이 되었기에 비로소 나는 떠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집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산적 활동을 위해! 그러니 잘 있거라 나의 집. 정말로 네가 나의 집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