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오히려 내 기억과 마음 속에 더욱 강하게 박혀 절대로 떠나지 않는 것 같다. 실물을 잃어버렸기에 관련된 기억과 감정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쥐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방 안을 뒤져보면 언제 샀는지도 모를 물건들이 줄줄이 나오기 마련인데, 정작 나는 쓰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펜 한 자루 같은 것에 온갖 신경을 뺏겨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책상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스티커 같은 것은 언제 샀는지 왜 샀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는 일이 꽤 된다.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 중 가장 아쉬워했던 실물 물건은 —디지털 데이터까지 합친다면 갤럭시 유심칩 인식 오류와 아이클라우드 백업 미비로 잃어버린 사진들이 일등이니까— 고등학교 3학년 세계사 교과서다.
나는 그 과목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처럼 그때도 이야기에 수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편이었던 나는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 한 권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해주는 이야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페이지 구석에 적어 가며 외웠다. 십몇년 외운 것들도 시험지 받으면 나를 배신하는 국영수에 싸대기 맞아 가며 공부하다가 외우기만 하면 성적이 나오는 과목이라니? 정말로 열렬하게 공부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그 교과서가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심지어 지금까지의 인생을 다 합쳐도 그렇다— 나의 일년에 대한 증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생 갖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능특강과 모의고사 종이들 사이에 그 교과서를 끼워넣은 것을 모른 채 재활용 수거 날 종이 수거함에 시원하게 수험서 뭉치를 던져 버렸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그 교과서를 버렸단 걸 알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갤럭시 핸드폰이 유심칩 인식 오류를 일으켜 먹통이 되고 저장되어 있던 사진이 죄다 날아갔을 때처럼 엉엉 울며 엄마를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그 책을 찾아야 한다고. 분리수거를 마친 지 벌써 두 시간은 지난 후였다.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에 엄마와 나는 아파트 한 동에서 일주일 동안 모은 종이 쓰레기가 다같이 뭉쳐 있는 종이 수거함을 뒤졌다. 한시간 반 정도를 뒤졌다. 나중엔 경비 아저씨도 어슬렁 와서 무슨 일이냐 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찾지 못했기에 그날 이후 다시 들여다본 적은 한번도 없고 이미 폐지 처리소에서 몇번이고 재활용이 되었을 테지만 나는 그 책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빨검파 삼색 볼펜과, 현란하고 감성 넘치면서도 그 밑에 깔린 글씨가 생생하게 잘 보이던, 삼천 얼마짜리 비싼 형광펜과 제일 작은 사이즈의 3M 포스트잇으로 가득하던 그 책. 너무 많이 넘겨 보아서 표지 모서리가 너덜너덜 닳았고 한 챕터 제목 페이지는 물에 젖은 흔적도 있던 그 특별할 것 없는 책, 그 책이 나한테는 그렇게 특별했다.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잘 챙겨서 방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다면 두번 다시는 들춰보지 않고 창고에까지 밀려났다가 어느 날 이건 이제 안 보지? 하는 엄마의 말에 그게 뭔데? 하고 되묻는 말의 주어 정도로 전락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랬을 게 확실하다.
몇년이 지나 나는 '재활용'을 잃어버렸다. 엄마는 늘 오늘 재활용인거 알지? 내지는 이따 재활용 가자. 라고 말하곤 했다. 아파트 전체가 분리수거를 위해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해서 내놓는 날을 뜻하는 말이었고 매주 수요일이었다. 그 집안일을 해야 하는 의무는 가족 모두에게 있었는데도 나는 투덜거리며 바구니를 들고 나서곤 했다. 나는 속도가 빨라서 엄마가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면 바구니 두 개가 거의 비워져 있었다. 대충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갔다. 다 합쳐 십오 분을 넘긴 적이 별로 없었다. 스물 몇 살 때 분리수거 방식이 일주일에 한번 수거함들을 설치하는 것에서 상시 설치로 바뀌었고 거의 동시에 아빠가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일을 도맡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재활용'을 잃어버린 것은 정말 별로 하나도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재활용과 관련된 다른 많은 추억들도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 이왕이면 다시 볼 수 있는 형태로 기록하고 싶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돌아온다. 다른 형태와 다른 내용일 수도 있으나. 물질적인 것이 비물질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거나 그 반대일 수도 있거나. 한번 가졌던 것을 영영 잃어버리기는 쉽지 않다. 결국 돌아온다. 재활용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