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Dir. Payal Kapadia
좀 부끄럽지만 인도 영화를 보는 것이 처음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작년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정식 개봉을 해주다니 얼씨구나 개봉날 예매했다. 이런 영화는 일주일 안에 관객 수가 어느 정도 확보되지 않으면 바로 내려버리니까 최대한 빨리 가서 봐야 한다. 조조로 예매한 건 조금 실책이었다. 솔직히 너무 졸렸다. 하지만 살짝 졸 때마다 예술적인 사운드트랙의 멜로디가 나를 부드럽게 깨워주어 집중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제목이 시적이라 더 마음이 갔고 한편으로는 전혀 예측되지 않기도 했다. 일부러 예고편도 하나도 보지 않고 갔는데, 상영관을 나오면서는 부슬비에 마음이 온통 젖은 기분이었다. 나는 축축한 것을 싫어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이 영화는 축축하지 않다. 사실 그렇게 촉촉하지도 않다. 그런 촉감적 표현보다는 비가 그친 밤 반짝이며 점멸하는 가로등을 멍하니 바라보는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좁디좁은 방을 나와 좁디좁은 지하철에 올라 좁디좁은 직장으로 향하는 대도시 뭄바이의 어른들. 완연히 밝지는 않은 낮과 완전히 어둡지는 않은 밤. 내가 쫓는 것이 꿈인지 자아인지 행복인지 불행인지 돈인지 직업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쫓지 못하고 그저 도피 중인 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사는 건지. 빛을 갈망하지만 그게 햇빛인지, 형광등인지, 손전등인지, 아니면 핸드폰 알림에 반짝이는 화면의 빛인지 알 수 없는 삶. 혹은 그게 중요하지 않은 삶. 도시의 삶은 그렇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빛을 적극적으로 쫓지조차 않는다. 그저 상상한다. 소원한다. 기다린다. 수동적이라 말하기엔 우리 모두 저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알고 있다. 삶에 수동적으로 구는 것이 꼭 그렇게 나쁜 것인지도 이젠 모르겠다. 계속해서 빛을 상상할 동력마저도 당연한 게 아니다. 빛을 상상하려면 빛을 경험한 적 있어야 하며, 빛이 있음을 믿어야 하며, 두리번거리며 빛이 있을 곳을 짐작해야 한다.
도시로 온 사람들은 빛을 쫓아 몰려든 하루살이들이다. 그건 나쁜 것도 비웃을 것도 냉소할 것도 아니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무슨 빛을 상상하든 간에 그건 도시에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빛을 쫓아 날아온 여정이 의미를 잃지 않으니까. 그들이 상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빛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금껏 버티고 기대해왔던 시간들이 의미를 잃지 않으니까. 이러한 생각들이 낳는 불안은 젊은 프라바와 아누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두 사람은 고향을 떠나 뭄바이에 와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다. 둘은 아직, 뭄바이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프라바는 또다른 빛을 쫓아 떠난 남편이 이 도시의 빛에 다시 이끌려 오길, 그가 쫓는 빛이 자신이기를 소망한다. 아누는 고향의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여기서 찾은 사랑의 반짝임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패르바티는 다르다. 그녀 역시 여전히 뭄바이에 빛이 있다고 믿지만 이제 그 빛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버리고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빛의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녀는 어디에서든 빛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패르바티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간 프라바와 아누 또한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빛을 경험한다. 프라바는 자기가 빛이라고 상상했던 것을 놓아주고 자기 안의 빛을 발견한다. 아누는 자기가 찾은 반짝임을 실재하는 현실로 끌어당겨 진짜 빛으로 끌어안는다.
내 꿈에는 모두 일상의 것들
두고 온 작고 흩어진 것들
내 희망은 내가 어디에 가든
지고 다니는 또다른 관일 뿐이네
내 앞의 당신은 내 이웃집에서
빛나고 있는 전등과 같네
보고만 있어도 밤을 지나는
나를 따뜻하게 밝혀준다네
마노이 선생이 프라바를 위해 짓고 읊는 이 시를 듣고 있으면 그가 빛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바로 프라바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의 '우리'는 살기가 고달픈 사람들, 고달프기까진 하지 않아도 자주 삶이 무겁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사람들, 대도시의 하루살이들—그러니까 이렇게 좀 졸리고 시적인 영화가 가끔 안겨줄지도 모르는 위로가 간절하여 좀 졸린 조조 상영 시간에 라지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후다닥 뛰어가야 하는, 그런 부슬비를 갈망하는 마음이 척박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일 테지만, 그보다 먼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나는 하나같이 조금 지쳤지만 웃을 줄 아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그들 각자가 '빛이라고 상상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이 마노이 선생이 상상하는 빛은 프라바다. 이웃집 전등과 같다는 표현은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벽을 넌지시 은유한다.
그렇다면 프라바가 상상하던 빛은 무엇일까? 정말로 남편이 보낸 것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은 독일제 밥솥을 온몸으로 처절하다시피 끌어안을 때, 그녀에게 그 밥솥은 단순한 밥솥이 아니라 상상 속 빛을 가득 안고 날아든 혜성과도 같다. 그게 정말 빛이었다면 끌어안는 순간 가득 차 그녀 자신을 포함한 주변 전체가 환해져야 마련일 텐데 왜 사방은, 그녀의 작은 집은, 광막하고 빽빽한 대도시는 여전히 어둑어둑할까? 왜 여전히 눈앞이 깜깜하고 작은 웃음도 흘리기가 어려울까? 그녀는 그 이유를, 그리고 정말로 빛이라고 상상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화 후반부에 비로소 깨닫게 된다.
아누의 빛은 시아즈다. 정확히 말하면, 시아즈와 시아즈가 상징하는 것—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꾸리게 될 그녀만의 인생, 사랑과 정열로 반짝이는 눈과 땀방울—이다. 하지만 아누는 이 빛이 빛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상상이란 눈앞에 실존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이니 확신, 확실성 같은 단어와는 가장 멀리 있다. 빛이라고 상상하지만 확신하지 못했던 것을 숨기고 감추려 하던 아누는 영화의 끝에서 마침내 그 빛을 손에 쥔다. 손을 펼쳐 보여준다. 의지하는 친구에게, 따르는 선배에게, 그리고 시아즈에게.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어 나란한 실존에 이른다. 그녀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이끈 사람이 함께 빛을 쫓아 살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또 내어주던 프라바라는 사실은 말로 다 하기 힘든 감정을 안긴다.
그렇다면 패르바티가 빛이라고 상상한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빛을 상상하지 않는다. 대신, 눈앞에 있는 빛을 본다. 막막하고 암담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프라바에게 고마워한다. 집 전기가 끊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즐거웠던 추억을 찾아낸다. 비록 자신은 이미 시골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집을 빼앗겠다는 건물주와 맞서 싸우겠다는 젊은이의 반짝이는 눈빛에 박수친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집이지만, 희망찬 빛이 웅성거렸던 도시에서의 삶을 떠올리게 해줄 잡동사니들을 소중히 들고 왔다. 사방이 어두워진 밤에도 전등과 노래를 끄지 않은 바닷가의 노점을 찾는다. 빛을 상상하다 말라 죽어가던 젊은이들을 별빛이 반짝이는 밤 바닷가에 데려다놓았다. 이 젊은이들은 다시 도시에 돌아가더라도 그 밤을, 별이 빛나고 노점의 전등이 빛나고 모여앉은 사람들의 눈이 웃음으로 반짝이던 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조금은 덜 지쳐 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빛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의 좋은 점은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소 나는 검은 배경에 하얀 글씨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다른 관객들과 함께 슬슬 몸을 일으키지만 이런 곳에서 영화를 보면 다들 가만히 앉아있고, 나도 덩달아 끝까지 앉아있게 된다. 오기인지 분위기의 압박인지. 어쨌거나, 그런 엔딩곡을 가진 영화라면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앉아 몰입을 유지하며 듣고 싶으니 그럴 수 있어 좋았다. 그 바닷가, 그 노점, 빛을 상상하는 그들이 둘러앉았던 그 바로 옆 테이블에 나도 함께 앉아있는 느낌. 별빛이 내 머릿속이라는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느낌. 착 가라앉은, 이상하게 맑고 선명한 공기를 마시는 느낌. 그 엔딩곡이 장식한 영화의 마무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두운 곳에 계속 있으면 빛을 상상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빛을 경험한지도 오래되었고, 빛이 있다는 사실에도 의심이 들며, 빛이 있을 곳을 짐작하기도 어려울 테니. 요즈음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꼭 그런 기분이었다. 빛 같은 건 다 환상에 불과하다고 냉소한 뒤에 어둠 속에 처박히고만 싶은. 그런 기분이 너무 자주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 영화가 내 빛이라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내게 빛이 되어주기를 무의식 중에 간절히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결론만 말하면 이 영화는 내가 상상하던 빛, 그 자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 영화와 함께 한 두 시간 이후의 나는 다시, 두 시간 전보다 조금은 덜 지친 상태로—아메리카노의 카페인 효과가 그때 돌았는지도 모르겠지만—계속해서 나의 빛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막연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