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Dir. Jesse Eisenberg
지난 몇년 간 많은 욕망들을 내려놓으려 분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버킷리스트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선댄스 영화제에 가 보는 것이다. 수상 결과에 보다 큰 관심이 쏠리는 영화제들(칸, 베니스, 베를린...)이 있다면 스크리닝과 이벤트, 커뮤니티 자체에 비중이 실리는 영화제들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렇고 선댄스 영화제가 그렇다. 이 영화제는 미국 유타 주의 파크 시티에서 개최되며 대형 제작사의 투자를 받지 않고 만들어진 독립영화들이 첫 선을 보이는 곳이다. 이른바 씨네필리아들의 사랑을 받는 감독들이 즐비한 것은 물론, 최근에는 몸값이 대단한 할리우드 배우들도 소규모 독립영화 출연으로 시네마에 대한 본인의 순수한 열정을 과시하고자 하므로 선댄스에 몰리는 관심은 날로 커지고 있다. 전세계에 배급이 가능한 중대형 배급사가 판권을 구매해 가는 경우도 많은데, 그러지 않고서는 영화관에서 보는 건 꿈도 못 꾸는 해외 관객으로서는 그저 환영할 일이다.
어쨌든 그런 덕분에 보게 되었다. 선댄스에서 최초 공개되어 각본상을 수상하고 서치라이트 픽쳐스가 구매하여 전세계에 보급한, <리얼 페인>
홀로코스트 투어를 통해 가족 뿌리에 깃든 역사적 고통을 돌아보며 개인적 고통에 대한 성찰에도 이르게 되는 두 유대계 미국인의 이야기... 라는 주제를 보았을 때는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캐릭터의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 나는 실제 역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컨텐츠를 의도적으로 피해 온 편이며 (자랑스럽지 않다) 이렇게 또 유대인과 홀로코스트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만이 조명되고 나도 그것을 소비한다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오랜 시간 좋아해온 배우의 연기, 그가 풀어가는 이야기들에 언제나 미칠듯한 끌림을 느꼈던 기억들에 대한 회상은 나로 하여금 집착적으로 리뷰들을 뒤지고 다니게 만들었다. 영화제 몇 군에서만 공개된 영화를 이미 보고 리뷰를 적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사회적 이슈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어떤 리뷰를 봐도 이 영화가 무분별한 학살을 옹호하며 역겨운 자기연민을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 한 구석에 드는 죄책감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로 했다.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보기로 결심한지도 어느덧 10개월이 지났고 내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살고 있는 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가 직접 참여하여 대화를 나누는 스크리닝 스케쥴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매했다. 개인사적 실망스러운 일들을 몇번이고 마주하면서도 이 날을 기다리며 버텨왔지만... 상영 바로 전날, 그가 개인적인 이유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대신 버추얼 미팅으로 참여하겠다고 쓰여 있었지만, 솔직히 그게 같은가? 보통 티켓의 두 배 가격이었던 티켓을 부분환불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료와 팝콘이 포함된 티켓이 아니었다면 꽤나 화가 났을 것이다. 상영관엔 사람이 꽉 찼고, 그는 음소거된 상태로 연결되었다가 다시 아이폰으로 연결했다가 화면을 돌렸다가 하더니 모더레이터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20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정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연결을 종료했다. 그게 끝나자 놀랍게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고 시작될 영화만을 기다렸다. 어쨌든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이 영화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내가 기대한 모든 것이 있었다.
영화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처음 떠올린 것은 최근 내가 느껴 온 감정이었다. 누구나 삶에 우여곡절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유달리도 예민하고 또 민감한 탓에, 때때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한다.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이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내가 지나친 자기연민과 자의식과잉에 빠져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게 그런 자각을 허락하고, 필연적으로 다시 자기연민의 구덩이로 굴러 떨어질 때마다 나를 꺼내준 뒤 등짝을 갈기던 일들이 여럿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참사, 자연재해, 전쟁, 미래를 잃어버린 어린이들,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아니,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심하게 비관적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뇌가 한번 씻기는 기분이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고통. 슬픔. 우울. 그거 진짜야? 너 정말로 그것 때문에 그렇게 아파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게 기만적이고 역겹지 않다고 생각해? 고작 그런 걸로 슬퍼할 여력이, 시간이, 마음이 있는 것 자체가 네 특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당장 몸을 누일 곳도 먹을 밥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티브이도 있으면서 대체 뭐가 그렇게, 뭐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건데?
세상에는 더 큰 진짜 고통이 있어.
그렇게 내 등짝을 스스로 몇번 갈기고 나면은 샤워에 수용성 우울을 씻겨내리고 행복하진 않지만 비참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생각이 시작된다. 하지만 심리 상담에서 내 고통을 돌아봐주라고 했는데? 이 고통은 진짜가 아니야?
내 고통은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게다가 남의 고통을 진심으로 아파하기는 커녕 저것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역겹지 않고?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이 안락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내 고통은 별 것도 아니라고 미룬 다음 남의 고통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슬퍼하기? 그게 현실도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그런 위선은 역겹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이렇게 괴로워하다 잠들곤 했다. 이런 내가, 이 영화 안에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본인 입으로 뱉기를 강박증 환자이며 나처럼 극도의 J 성향인 것이 분명한 주인공 데이비드가 택시를 타고 꽉꽉 막히는 도로 위 택시에서 초조해하고 있다. 그는 벤지에게 다섯 번 가량의 음성메시지를 남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전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고선 진작 전화나 문자로 확인했다는 말을 했을텐데, 그런 응답을 받지 못했는데도 계속해서 남긴다. 벤지가 음성메시지를 확인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벤지는 보통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고도 확인했다는 답장을 하지 않는 사람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편 벤지는 일찍이 공항에 와서 데이비드를 기다리고 있다. 데이비드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인다. 벤지는 음성메시지를 잘 확인하지 않거나 확인하고도 확인했다는 답장을 하지 않기 일쑤이고, 중요한 약속에 번번히 늦곤 했던 사람인 것이다.
벤지의 자유무쌍하고 제멋대로인 행적은 영화 초중반을 지나며 계속된다. 벤지는 도착하는 호텔로 대마를 배달시키고 데이비드가 분명 먼저 씻겠다고 말했음에도 먼저 샤워실로 들어가버리거나 샤워할 때 노래를 틀고 싶다며 데이비드의 핸드폰을 요구하고 호텔 옥상으로 가는 문을 몸으로 부딪혀 열어버린다. 잘 모르긴 몰라도 엄숙하고 숭고한 전투를 기린 듯한 초대형 동상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그들을 흉내내며 사진을 찍고 투어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인다. 관심이 가는 여자에게 말을 걸면서 루저예요? 왜 혼자 있어요? 하고 묻는다. 데이비드가 잘 모르겠어, 이러면 안될 것 같아, 하고 주저하는 모든 일들에 벤지는 주저함이 없다. 그는 당당하게 나서서 이끌고 자기 기분과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나중에 데이비드의 입으로 직접 뱉어지지만, 이미 데이비드가 그런 벤지를 내심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벤지의 예측불가능함과 변화무쌍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 온다. 퍼스트 클래스 기차를 타고 가던 투어 일행은 식사를 하며 전문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중이다. 그때 벤지는 폭발한다. 그가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모두가 들을 수 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역사적 고통을 목격하고 느끼러 가면서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가는 게 말이 안 된다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슬퍼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냐고? 적어도 죄책감이라도 느껴야 하지 않느냐고?? 벤지가 폭발하듯 묻지만 아무도 벤지의 논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투어 일행 중 한명이 되묻는다.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해? 그는 퍼스트 클래스를 박차고 나가고 데이비드가 그를 따라간다. 여기서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투어에 왔으면서 고통을 느끼기는 커녕 안락하고 근사한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 있다는 이 괴리감, 붕 떠다니며 부유하는 듯한 감정과 감각, 하지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내가 뭘 할 수는 없고, 사실 내가 그 고통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주제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도 어불성설인 위선 같고, 사실은 저 사람의 말이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저히 그런 나와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그 모든 사고와 감정의 회로... 그런 벤지가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를 감싸고 지나갔다. 수용소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힘겹게 우는 벤지가 나를 휘감고 지나갔다.
벤지는 한번 더 폭발하는데,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이다. 전문 가이드가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는 순간 벤지는 폭발하듯 따지기 시작한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설명들 때문에 이 모든 게 차갑게 느껴진다고, 이건 적절한 추모의 방식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진짜로 여기 땅 아래 묻혀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당황했던 가이드는 뭔가를 깨달은 듯 수긍하고 모두가 벤지가 제안한 새로운 방식을 따른다. 돌을 주워 묘비 위에 올려두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연 저 방식이라고 해서 거기 묻힌 사람들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을까? 어떠한 애도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윽박지를 자격이 될까? 저건 또 어떠한 방식의 위선이 아닐까? 자기 감정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사람의 일방적인 강요와 조종이 아닌가? 영화 극후반부, 벤지와 데이비드가 할머니가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아 돌을 두고 가려다가 "거기엔 진짜 사람이 살고 있으니 걸어다니는 데 방해되지 않게 그 돌은 치우라"는 소리를 들을 때,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조금 알쏭달쏭하면서도 윤곽을 갖는다. 고통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어떠한 방식은 어느 곳에서는 정말로 감동적이고 진정성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모든 고통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미 고통이 사라지고 희미해진 자리에는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때때로 어딘가 먼곳에 가 있는 듯한 벤지의 얼굴, 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인 벤지와 데이비드의 대화, 그리고 영화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공항에 앉아있는 벤지의 멍한 표정에서, 벤지가 최근에 목숨을 버리려 시도할 만큼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겪었으며 그것의 여파가 아직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벤지는 영화 내내 죽은 사람들의 '진짜 고통'과 연결되려고 했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더 큰 맥락을 가진 더욱 심각해보이는 고통들에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면, 세상에는 더 큰 진짜 고통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면, 내 자신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달려들던 내 내면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 투어에서 돌아와야만 했고, 갈 곳 없이 공항에 혼자 앉아 있기를 택했다. 그가 감당해내야 하는 그의 '진짜 고통'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데이비드는 어떤가. 말했듯이 나는 데이비드와 더 비슷한 사람이다. 그와는 달리 뉴욕 한복판에 안락한 집과 가정과 건실한 직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웹사이트에 광고를 다는 일을 한다. 그 일은, 엄밀히 말해서, 이 사회를 더 따뜻하고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일은 아닐 것이다. 벤지가 거는 딴지에 그래야 사람들이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하고 반박하면서도 데이비드는 스스로 그것을 조금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는 강박 장애로 약을 먹고 있고 모든 일에 전전긍긍한다. 벤지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좀 더 감정이 풍부했고 잘 울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오로지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를, 그리고 벤지를 실패작이라는 듯 말한다. 여기서 실패작은 부와 명예, 사회적 성공을 충분히 이루지 못했음이 아니다. 이 투어에서 경험한 역사의 뼈저린 고통을 딛고 수많은 기적 덕분에 살아남은 할머니, 그녀의 피를 물려받고 그녀의 유산을 지키며 살아왔지만 이 둘은 전혀 그러한 기적적임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려 '고통'을 '체험'하러 오는 '투어 상품'에 아낌없이 돈을 쓸 수 있을 만큼 가졌고 누리고 있으면서 무언가에 감사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는다.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데이비드는 그런 자신을 아주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게 기만적이라고. 역겹다고. 위선이라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 내내 초조하고 벅차 보인다. 당연하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맞고 있으니까.
벤지의 고통이 대사로 드러났던 후반부 둘의 대화에서, 데이비드는 진심으로 벤지의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네가 늘 부러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를 위로하려 애쓰며 본인도 위로받아야 할 것 같은 얼굴로 울먹인다. 그건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여기에서도 위선을 느꼈다. 지금 이거, 네 고통을 잊기 위한 현실도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네 자신의 '진짜 고통'을 직면하고 그걸 감당하고 처리하기보다, 남의 고통을 보며 내 고통은 별 것도 아니라고 미루는, 그러면서 은근히 위로받는, 그러면서 슬퍼하는 다른 형태의 자기연민과 위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엔딩의, 혼자 남겨진 벤지의 표정은 영화 속의 그 어떤 장면보다 파괴력이 있지만 나는 그가 데이비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같이 뉴욕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에게 말이다. 영화는 데이비드가 정말 좋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껴안는 모습을 보여준다. 벤지가 거기에 갔다면 자신의 처지를 재확인하고 비교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사랑하는 사촌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뿌듯함과 얘에 비하면 내 처지가 낫다는 안도감과 그런 생각을 하는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를 잔뜩 떠안고 말았을 테지. 게다가 데이비드는 늘 남모르게 거침없고 자유분방하고 솔직하고 매력적인 벤지를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가져오기까지 했으니, 벤지가 투어 일행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 가족들을 홀려버리기라도 했다면, 아! 그 복잡한 심정들을 대체 다 어떻게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벤지가 나고, 데이비드가 나고, 이 영화가 나였다.
영화는 여덟 시 즈음 끝났고 팝콘 덕분에 배가 고프지 않았다. 천천히 그다지 멀지 않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지하철역에서는 영화 시작 전 버추얼 미팅을 할 때 핸드폰으로 찍어놓은 사진과 영상들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잘 모르는 사람에게 유명 할리우드 배우라고 하면 한번쯤 반문이 되돌아올 것 같은, 위축되어 있고 불안으로 손을 꼼지락대며 머리카락을 만지고 눈을 깜빡거리고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시종일관 사카스틱한 농담을 던지고 그러면서도 진정성 있는 감사의 말을 전하는 이 사람이,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사실이. 아마도 당분간은, 모르긴 몰라도 향후 5년간은 세상 그 누구보다 이 사람의 다음 이야기가 가장 궁금할 것이라는 사실이.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된다면 바로 저 사람을 닮고 싶다는 사실이... 어쩐지 새롭게 추가된 나의 '진짜 고통'으로 느껴졌다.
다음 영화는 꼭 선댄스 영화제에 직접 가서 감상할 수 있기를.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