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Writ. Ali Smith
어제는 첫눈이 왔다. 아침부터 집 안 온도가 심상치 않았다. 날씨 어플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눈 예보가 있어 손꼽아 기다렸다. 열시 즈음이 되자 얕은 눈바람이 흩날리기 시작했고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뛰어나갔다. 오후에 잠깐 멈췄던 눈은 해가 지면서 다시 시작됐고 저녁 내내 계속됐다. 요즘은 네시만 되어도 한밤중 같지만 눈이 와서 주변이 한결 밝았다. 자고 일어나니 눈이 꽤나 쌓여 있었고, 또다시 옷을 대충 걸치고 뛰어나가면서, 나는 내가 올해 내내 얼마나 간절히 겨울을 기다려왔는지 깨달았다. 마침내 겨울이 당도했고, 나는 올해 내게 일어난 그 어떤 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은 영국 작가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4부작 중 두번째로 출간된 책으로, 2020년 <Summer> 가 발간되면서 4부작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4부작의 다른 책들을 읽는 데에는 관심 없다. 나는 오로지 겨울에 대한 사랑으로 이 책을 사기로 결정했으며 다른 계절에는 별 관심도 없다.
제목이 이렇다보니 처음 읽고 난 이후 매년 겨울이 오면 이 책을 떠올리곤 하는데, 나도 내 책 제목은 이렇게 지어야 나같은 독자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겠거니 싶다. 그런데 나처럼 책을 고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고 또 앨리 스미스의 책이니 기억되는 것이지 보통 같으면 너무 특색 없는 제목이라 잘 안 팔리지 싶다. 여행지에서 인생샷 몇 장만 남겨도 그저 성공적이었던 여행으로 미화되는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 속에 남길 문장 몇 개만 찾아도 마음 좋았던 독서 경험으로 기억되곤 한다. 내 마음에 콱 박혀 잘 나가지 않는 문장들과 잊고 살았지만 다시 볼 때마다 생생하게 마음을 울리는 이 책의 문장들을 여러 개 소개하겠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본질적으로 재방문을 뜻합니다. 재고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경과하는 시간의 리듬을 의미하고, 동시에, 어쩌면 그보다 더 유의미하게는 우리를 위로하는 시간의 저항없는 순환, 그 영원한 주기 가운데에 이 특별한 절기가 어김없이 또 돌아왔음을, 어둠과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가 환대와 친절을 아울러 모으고 또 베푸는 시기이자 환대와 친절에 적대적이기 십상인 세계에서 우리가 일말의 호사를 누리는 게절이 돌아왔음을 뜻하거든요. 어둠에 잠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꿈조차 방해 않는 네 깊은 잠 위에 펼쳐지니 너 낙담할 일 하나 없어라.
우리 운명이 기술의 손에 달린 거냐 기술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린 거냐?
그 방식과 시간은 다 제각각이어도 우리는 모두 결국 스스로를 채굴하고 훼손해 급기야 파괴하고 마는 법이라고 소피아는 생각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뭐죠? 소피아가 말한다. 답은 질문이죠. 초대받지 않은 소피아의 식탁 앞에 앉아 남자가 말한다. 바로 이 질문이요. 우리는 과연 누구의 신화를 믿을 것인가?
멀리 구름이 자욱하게 피어 오르고 섬광이 번뜩일 동안 특징 없는 건물에 앉아 재앙이 닥치기만을 심장 졸이며 기다리는, 어느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 폭격에 내 두 눈이 멀었구나, 아예 녹아내리고 말았구나 깨닫게 될 순간만을 기다리는.
내 생각에 당신 어머니는 땅끝에 내몰린 기분으로 세상을 사는 수백만 명중 한 분 같아요.
사실도 허구도 낭만도 이념들도 사랑도 죽음도 죽었다고 말하는 이 소설의 도입부는 어쩐지 거대한 비관의 터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영국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이 정도의 염세주의는 영국 소설이라는 요리에 깔린 치킨 스톡과 다름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 소설은 감정에 축축하게 젖어 하루종일 울고 있느라 이야기 전개 같은 건 뒤로 하지도 않으며, 모든 게 죽었다고 말해놓고선 사실은 모든 게 살아있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어줍잖은 낙관과 트위스트로 이야기를 이끌지도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천천히 함께 흐른다. 이야기는 극단적으로 비참한 구렁텅이로 치닫지도 않고 죽었던 모든 게 살아나는 급작스러운 기적을 마주하지도 않는다. 럭스가 전해주고 간 빛이 희미해지면 소피아는 여전히 모든 게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식물이 시들어 죽고 곰이 동면을 취하고 사람들의 어깨와 구직 시장이 무서울 정도로 쪼그라드는 겨울에도... 하늘이 무서운 속도로 어두워지면 건물에 불이 하나 둘 켜지고 하얗게 쌓인 눈이 캄캄한 거리를 밝혀주는 계절을, 모두가 죽음을 마주하는 동시에 탄생을 고대하는 계절을, 추운 바깥 세상에 뺏기지 않게 내 마음에 단단히 품은 온기가 모든 게 죽어있는 자리를 따뜻하게 데우는 계절을. 너무 춥고 모든 것이 죽었으니 너도 잠깐 쉬어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은 계절을, 길 가는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인사를 건네도 웃으면서 되돌아오는 말이 있는 계절을...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모든 게 죽고 사랑마저 죽었으니 내가 나를 위로해도 된다는, 우리가 서로를 위로해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은 이 계절을, 나는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리고...
소피아도 그 해 겨울엔 이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