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Dir. Nanni Moretti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는 스쳐가는 찰나의 주목할 만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특별한 드라마적 이벤트가 아니라도 결국 어떠한 하이라이트가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는, 특별한 해석과 의미 부여 없이는 그저 흘러가버릴 일상의 이야기는 절대로 비추지 않는다. 영화는 내게도 특별한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감을 심어주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내 현실엔 영화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고, 내 인생을 영화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자기연민과 자기방종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이런 나도 어쩔 수 없이 영화가 좋다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영화들이 몇 있다. 이런 영화는 일년에 한 개 찾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올해는 5월에 찾았다. 봄도 여름도 아닌, 그 어중간한 미지근함 속에서...
5월 말의 나는 내일을 한없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청천벽력이 나를 덮칠까 잠 못 이뤘으며 좋은 일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그게 진짜 좋은 일일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늘 문제는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나의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했고, 나의 현재는 나의 미래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못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과거의 불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후회에도 시달렸다. 바꿀 수 없는 과거가 미래에 일어날 재난으로 나에게 덮쳐올 것 또한 근심했다. 이런 식의 루프에 갇혀 있으면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찬란한 내일로> 라니? 내일이 찬란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과연 누가 내일은 찬란하다고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본 호평과 아름다운 이탈리아 남부 풍경에 대한 기대로 예매는 했으나, 몇시간 자지도 못한 채 조조 영화를 보러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도착할 때까지 그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내일은 과연 찬란한가? Will tomorrow be actually brighter? 어두운 어제와 오늘을 모두 보상하듯 환하게 밝혀 줄 것인가? 누가 내일은 반드시 찬란하리라고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 밝은 빛을 약속해준단 말인가? 잔뜩 비뚤어진 정신상태로 아트나인 상영관 안에 들어가 앉았다. 상영관엔 나와 한명 더 이렇게 딱 두명의 관객이 있었다. 현대인의 암울함을 상징하는 초대형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1리터에 샷은 한개밖에 안 들어간 듯 밍밍한 것이 특징이다-를 쪽 들이키며 이 영화를 '비판적으로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막이 오르고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됐다. 모두 합심해 '미래의 태양' *이태리어 원제 이라는 어구를 벽에 칠한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된다. 첫 장면은 온통 어두운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 불이 켜지는 장면이었다. 해가 솟아오를 내일이 오기 전, 깜깜한 밤을 밝히는 밝은 빛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한다. 손을 맞잡고, 함께 모여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웃고 대화하며 밝은 밤을 자축한다.
그때 나는 이미 깨달은 것이다.
이 영화는 찬란한 내일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는 영화가 아니다. 찬란한 내일을 간절히 기다리는 영화도 아니다.
지금의 깜깜한 밤을 함께 밝히자고 말하는 영화다.
주인공이자 감독 본인의 페르소나, 나이와 명망이 있는 구시대의 영화 감독 조반니는 깜깜한 밤을 함께 밝히고, 꺾이지 않는 신념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 <미래의 태양>을 찍고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조반니의 페르소나가 되는 방식으로 두 레이어를 거쳐 다시 감독 본인 난니 모레티의 페르소나가 된다. 난니 모레티도, 조반니도, 영화의 주인공도 깜깜한 시대를 밝히기 위해, 꺾이지 않는 신념과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며 긴 세월을 살고 버티고 걸어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쯤 되면 제멋대로 출렁이는 인생의 파도에 익숙해졌다고 할만한 나이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 파도에서 허우적거린다. 영화의 주인공은 굳건한 신념과 완고한 태도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맞고, 조반니 또한 영화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흔들고 파괴하는 현시대의 변화를 감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화 완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들과 개인사의 혼란들을 마주하며 끝없이 한숨을 쉬고 신음소리를 낸다. 난니 모레티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겪어 왔으리라.
그렇게 나이를 먹고 그렇게 많은 것을 겪으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온몸과 마음을 바쳐 성심성의껏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전히 인생의 파도는 무례할만큼 매몰차게 몰아치며, 자꾸만 내 발목을 잡는 과거의 나와 과거의 내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현재의 나를 들어올려 가늠조차 안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로 어떻게든 옮겨놓아야 한다. 흔히들 열심히 살고 힘든 걸 참으면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조반니는 아주 쉽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지난 날과 지금의 이 고통은 태양이 밝게 비추는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고. 미래는 찬란할 거라고 믿었지만 그 미래가 현재가 되어버리자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져버리는 이 세상, 그걸 몇번이나 겪고도 또다시 겪고 있는 이 나이든 중노년의 한탄은... "우리 어제로 돌아가면 안 될까?" 이다.
우리 어제로 돌아가면 안 될까?
어쩐지 모든 걸 망쳐버리는 것만 같은 지금의 내가 모든 걸 망쳐버리기 전으로, 내가 아직 세상을 굳건하게 믿고 나를 믿고 나의 신념을 믿고 꼿꼿이 버티고 서서 싸울 수 있던 과거로,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같이 고민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을 만드는 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때로... 우리 돌아가면 안 될까?
하지만 슬프게도 당연히, 그럴 방법은 없다. 깨져버린 결혼을 되돌릴 방법도, 자극적인 것만 찾게 된 관객들과 대형 스트리밍 플랫폼에 뺏긴 영화 산업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방법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피어난 사랑을 없는 것으로 되돌릴 방법도 그에겐 없다. 우리 모두에게 없다. 조반니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영화가 근사하게 완성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다. 넷플릭스에게 이 영화가 돈을 벌어다줄 것임을 약속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세상도 조반니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다. 그가 노력하면 깨져버린 결혼이 다시 회복될까? 그가 노력하면 세상이 다시 영화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고민하게 될까? 그가 노력하면 미래의 불확실성이 제거될까? 통제될까? 최소한 감소하기는 할까? 이 세상은, 이 미래는 그 중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무엇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바람이 무너져버린 <미래의 태양>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한다. 그는 도저히 내일로 갈 용기가 없다. 그럴 의지가 없다. 심지어는 내일로 가지 않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며, 그 자신도 바뀌어선 안된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조반니는 바꿀 수 있다. 조반니가 이 주인공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내일로 가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그 미래로 나아가도록 결말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다. 조반니가 바로 그 주인공의 창조자이며 그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반니는 이 주인공에게 찬란한 내일을, 태양이 밝게 비추는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찬란한 내일이 존재한다고 믿기만 한다면. 믿기까지 하지 않아도 기대라도 걸어볼 수 있다면. 그리고 조반니는 그렇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자살하지 않고, 꼿꼿하고 완고하던 신념과 아집을 버린 뒤 아무것도 약속되지 않은 미래에 자기 자신을 던져 함께 있던 동료들과 손잡고 밝은 내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본인이 만드는 영화의 결말을 바꿨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조반니는 여전히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고 약속받을 수 없다. 영화의 결말을 바꿨으니 큰 돈을 벌어들일 거라고 약속할 수 없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호평을 약속하지 않을 것이고, 영화에 대한 조반니의 신념은 갈수록 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만 치부될지 모른다.
하지만 조반니에게 찬란한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감독 난니 모레티이다.
난니 모레티는 조반니가 본인 영화의 결말을 바꿔 주인공이 찬란한 내일을 마주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조반니가 바꾼 결말로 완성한 영화를 본 관객들도 그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니 모레티는 조반니의 영화를 본 관객들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믿기를 바란다.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조반니는 함께 행진한다. 밝은 태양 아래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간다. 난니 모레티가 만든 영화의 주인공 조반니는 마침내 '찬란한 내일'을 맞는다.
다시 말하지만, 본인이 만드는 영화의 결말을 바꿨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난니 모레티는 여전히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고 약속받을 수 없다. 이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상업적 성공도 이루지 못했고 영화 비평가 몇몇은 날카로운 혹평만을 던졌다. '영화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난니 모레티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영화 감독은 이제 몇 되지 않으며, 그들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인간 본성을 추잡하게 파헤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시도 울림 있는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 영화들을 만들 것이다. 난니 모레티의 현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찬란한 내일'은 여전히 약속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찬란한 내일이 올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현실이 냉혹하고 어둡고 가차없는 밤과 같음을 부정한 적도 없다. 다만 이 영화는 이것을 함께 밝히자고 말하는 것이다. 함께 손을 잡고 전깃불을 켜자고. 죽지 않고 신념에 묶여 스스로를 파괴하지 말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같이 나아가자고. 걸어가자고. 계속 행진하자고. 어제로 돌아가기를 꿈꾸거나 오늘에 머무르는 대신 내일로 같이 나아가자고.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곳이 찬란한 미래라고, 해가 환하게 비추는 내일의 아침이라고 함께 믿자고. 그것만이 오늘의 밤을 밝혀줄 거라고.
조반니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마다 가족과 함께 앉아 특정 영화를 보며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먹는 의식을 치른다. 그 의식의 디테일과 방식은 아주 엄격하지만, 그의 아내가 먼저 그 의식에서 이탈한다. 아마 다음에는 그의 딸도 그의 곁에 없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벌써 다르고 내일은 정말로 완전히 다를 것이다. 조반니는 이 의식을 포기했을까? 아니면 영화 만들기를 포기했을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다음 영화를 시작하는 그를, 젤라또를 들고 담요를 두른 채 소파에 앉아 영화를 재생하는 그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반니는 다음 영화를 찍을 것이고, 그 때의 젤라또를 먹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지금 스스로에게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다.
아직도 이 영화를 보기 전의 나처럼 '찬란한 내일'따위는 믿고 싶지도 기대를 걸고 싶지도 않고 딴지만 걸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조반니가 젤라또를 또 먹을 거라는 사실만은 믿어달라. 그것만은 나라도 약속할 수 있다.
어쩌면 나에겐 그 약속만으로도 충분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