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Writ. 한강
내가 어렸을 때는 종이로 된 실물 책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미덕으로 여겨진다. 슬프게도 나는 이 만만치 않은 무게의 존재들을 가득 쌓아 이고 지고 떠돌아다닐 수는 없다는 것을 -또는 평생 이고 지고 떠돌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실물 책을 사는 빈도를 줄였다. 그걸 깨닫기 전 다행히 사둔 책이 한강의 <소년이 온다>였다. 온라인 서점에 올라온 책 소개를 보고 의무감이 들어 샀다. 그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다짐일 것임을 짐작했다. 하지만 그 책을 구매하고 선반에 꽂아 두는 순간 벌써 할 일을 다했다는 거짓 위안이 찾아왔고 나는 2024년 지금까지도 그 책을 제대로 펼쳐보지 않았다.
그렇게 2024년이 되었고, 인생의 거의 모든 날들이 그렇듯 아주 심란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호외가 도착했다. 노벨상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처럼 느껴졌던 것들은 갑자기 나에게로 와서 아주 특별한 일들이 되었다. 내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와 국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또한 나의 모국어로 쓰인 글이 그 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올해 내내 흔치 않았던 기쁜 소식으로 모두가 들뜬 사이 나는 마음 한구석에 상냥한 짐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핑계를 대며 미룰 수 없겠구나. 스크롤을 내려 넘길 수도 없으며 눈을 돌리고 회피할 수도 없겠구나.
이제는 읽어야만 했다. <소년이 온다>를.
그동안 일독을 미뤄 온 이유는 별것 없다. 나는 고통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고, 깊은 고통을 생생하게 그린 문학 작품이나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나의 과몰입 성향은 그것을 나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한마디로 직접 고통받는 것도 아닌 간접 체험도 무서워 피해 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비겁하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후 북클럽에서 <소년이 온다>를 같이 읽기로 하지 않았으면 아마 아직도 미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루고 미루다 모임 전날 밤 카우치에서 눈물에 얼굴을 파묻으며 완독을 했다. 모임 장소로 향하면서도, 나는 내가 이 책에 대해 어떤 말과 의견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슬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몰입과 고통, 이러다가 영영 이 느낌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하는 건 아닐지, 이렇게 영원히 이것을 설명할 언어를 알지 못하는 건 아닐지... 모임에서 함께 의견을 나누기로 한 질문 중 하나는 '제목이 왜 <소년이 온다>일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6장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소년이, 아니 소년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곧 소년이 될 어린아이가. 영원히 소년으로 남을 동호가 어머니 앞에서 걸어가는 모습. 꽃이 핀 곳으로 가자며 그의 어머니를 이끄는 모습. 그가 앞으로 걸어오고, 걸어갔던 모습... 하지만 뒤이어 다른 의문이 따라왔다. 그런 장면을 상징하고자 했다면 <소년이 간다>가 맞았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모임 내에서도 의견을 나누었지만 뚜렷한 설명을 찾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이 부서지고 무너졌다가 간신히 다시 붙은 곳 안쪽 깊숙이 이 책을 깊게 넣어두고 다시 일상을 살았다. 되새기지 않는 고통은 쉽게 희미해지며,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그리고 저번 주 토요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리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강연에 참석했다.
강연장인 홀 입구에는 강연 스크립트 전문을 출력해 스테이플러로 제본한 간이 책자들이 놓여 있었다. 스웨덴어/영어/한국어 본으로 나누어 가져갈 수 있었으며, 나는 영어와 한국어 버전을 가지고 왔다. 그녀의 작은 촛불 같은 문장들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 놓았는지 궁금했다. 그런 피상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며 번갈아 읽고 있자니 강연이 시작되었다. 첼로리스트의 바흐 곡 연주로 분위기가 잡혔고 간단한 소개말 이후 한강 작가가 연단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한국어로 강연 스크립트를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쓴 글을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씩 눌러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낭독이 시작된 지 머지않아 이전에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소년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흔히 교훈적인 이야기들에서 그렇듯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소년 동호를 '너'라고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바로 책을 읽고 있는 독자 나 자신이다. 동호, 소년, 광주,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그 모든 감정과 고통과 연민이 실재했던 그 순간은 과거의 고통이나 과거로 잊히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혼이 되어 온다. 나를 향해 온다. 시공간을 건너 계속해 되돌아와 우리 앞에 놓이고 결국에는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말 같지 않은 핑계를 대며 이 책을 피해 왔던 나에게조차 고맙게도 예외 없이 도착해 주었다.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는 어떠한 형태로 당도할 것이다. 벌써 코앞에 왔다는 것을, 이미 온몸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재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는가? 한강은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소년과 나의 손을 모두 잡아 서로를 연결했다. 현재의 일상이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도록. 나와 같은 비겁자가 그것을 외면하고 눈을 돌리다 그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거의 고통이 그를 기억하려는 현재를 볼 수 있도록, 과거에서 홀로 남아 외로워하지 않도록. 과거와 현재가, 나와 타인이,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금실로 연결된 우리 모두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녀가 말했듯, 사랑이 고통을 낳고 고통이 사랑을 증거 하도록.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아주 최근 나는 내가 무언가를 계속해서 쓰지 않고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막상 키보드 앞에서는 머리가 멍해지고 손이 헛돌곤 했다. 강연을 다녀온 후 스크립트 전문을 읽고 또 읽었다. 이 글 안에는 이탤릭체로 처리된 부분들이 있다. 기울어짐 표시로 강조되었거나 그렇지 않은 많은 질문들이 있다. <소년이 온다> 외에도 다른 소설들에 영감을 주고 하나같이 관통해 온 질문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 머릿속과 마음속을 꽉 죄어 놔주지 않는 미스터리들...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답을 구하기 위해, 또 이야기하기 위해 글을 써 오셨다고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와 위안이 몰려왔고 눈물이 났다. 세상에 나 혼자만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이 세상을, 그 많은 면면들과 그 커다란 하나의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력감과 허탈감과 분노에 몸부림치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고... 이 책을 쓴 작가와 이 책을 읽고 깊게 공명한 모두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앞으로 어떤 글이든 쓰고자 한다면, 이 질문들을 회피하지도 망각하지도 미뤄두지도 적당히 타협하지도 압축시켜 처박아두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똑바로 마주하고 깊게 고민해야만 한다. 그 어떤 질문들도 그냥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그냥 외면하고 피해버려서는 안 된다, 그게 설사 죽을 만큼 괴로울지라도. 그렇게 내게 올 것이 소년인지 존재치도 않는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왔으면 좋겠다.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바란다. 그렇기에 쓸 것이다.
*2024-12-07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 강연 스크립트 전문: 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2024/han/225027-nobel-lecture-kor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