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Created by. Adam Kay
무언가에 대한 호불호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벤 휘쇼를 싫어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기는 영 어렵겠다고 생각한다. 벤 휘쇼와 내가 사랑하는 또 다른 드라마 <원 데이>의 주인공인 암비카 모드가 함께 출연하는 이 드라마, <조금 따끔할 겁니다>는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20년 전 영국 NHS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는 현실고발적 이야기... 인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직접 겪은 것을 바탕으로 쓰고 만들었으니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좀 과장은 되었을지 모르나, 애초에 현실의 비극성을 능가하는 소설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주인공은 다 죽은 눈으로 공립병원에서 일하는 산부인과 의사 애덤이고, 그의 사이드킥이자 멘티 비슷한 수련의 슈루티가 등장한다. 애덤은 의사 드라마 등장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구하지 못한 환자와, 이미 저질렀고 앞으로 저지를 실수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사회적 정상성과 완벽성을 강요하는 엄마와 충분한 사랑을 되돌려줄 수 없는 연인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능력과 체력, 그리고 양심까지 착취하는 공공 의료 서비스의 시스템이 그를 괴롭힌다. 이 모든 고통을 신파 없이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내가 영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이유다.
한편 내가 더 애정을 가진 캐릭터는 의사 자격 시험을 앞둔 수련의 슈루티다. 그녀는 영국에서 살아가는 유색인종 여성이며 정식 의사라는 목표를 향해 가열차게 달려가는 사회초년생이다. 봉급은 없다시피 하고, 본가와 떨어져 혼자 사는 런던의 단칸방 속 냉장고엔 상한 우유나 겨우 들었다. 과도한 일과 어려운 공부 양쪽으로 시달리지만 사수는 별 도움이 안 되고 경력과 경험의 부족뿐만 아니라 인종으로도 무시를 당하고 너무 지쳐 친절한 태도를 잠깐 잃으면 상황은 바로 최악으로 치닫는다. 무엇보다 그녀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그녀의 빠른 눈치와 따뜻한 마음씨다. 공공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고 슈루티는 그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진심으로 신경쓴다. 가정폭력의 징후를 빠르게 알아차리며 그것을 지나치지도 못한다. 슈루티는 갈수록 깎이고 있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그녀에게도 무던하고 무덤덤해지는 때가 왔을까. 적어도 그녀의 주변 사람들, 그녀를 이끌어줘야 했을 선배들은 그걸 바랐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슈루티는 멘티까지 떠맡게 된다. 그녀의 어깨 위에 또다른 짐이 내려앉는 순간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주저앉기 직전 슈루티는 멘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는 거기에 없다. 마침내 슈루티는 깎임을 멈추고 꺾여 버린다.
그녀가 떠나고 애덤은 또다른 고통을 획득했다. 나는 슈루티를 외면한 것에 대해서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가 얼마나 착취당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겨진 사람에게 지속되는 고통이란 또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슈루티의 선택을 안타까워하기조차 힘든 것처럼, 애덤의 지치고 슬프고 닳은 얼굴에도 어떠한 말조차 더할 수 없다. 드라마는 잔뜩 메였을 목으로 공공 의료 시스템의 착취성을 덤덤하게 고발한 애덤이 마침내 의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게 되는 선택으로 끝이 난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과 망가진 시스템 속에서 계속해 나간다는 게 어떤 미래로도 느껴지지 않아요
의료민영화와 시스템 개혁(이라고들 부르는 것)에 대한 논의가 한국 사회 내에서 가시화되고 몸집을 불려가면서 사람들은 미국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망했는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치료마저 보장받을 수 없고 보험 회사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시스템. 작은 병에 걸려도 생계가 위험하고 큰 병에 걸리면 기득권도 앞날이 불투명한, 그런 시스템. 그렇다면 보통 최소한의 공공 의료를 무료 또는 아주 낮은 가격으로 보장하는 유럽과 영국의 시스템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이 드라마는 아니라고 말한다. 공립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밤낮과 최소한의 인권-예를 들면, 화장실을 갈 권리-을 포기하고 일하며 그래도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비싼 돈을 내고 가는 사립 병원은 환자가 갑자기 위급 상황에 처해도 대처하지 못한다. 신념과 양심을 지닌 의사는 희생과 봉사를 강요받고 사람을 살리고 싶어하던 사람이 죽는다. 이 상황은 어떻게 해야 나아질까? 세금을 더 걷으면 나아질까? 사람들이 좀 더 예의와 관용을 갖추면 나아질까? 나아지기는 할까? 영국 드라마 특유의 비관과 염세주의가 이 드라마를 온통 감싸고 있는 것을 무시하더라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시스템을 실제로 고치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개인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 그렇지만 그럴 책임도 없을까? 이렇게 한번 겉핥기로 관심을 가졌으니 도의적 책임은 다한 걸까? 어차피 내 일은 아니니까 이제 그만 신경 꺼야 할까? 당장 내 코가 석자니까? 사는 게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생각해야만 할까? 의사들만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거 아니니까, 그냥 힘들겠다... 하고 말아야 할까? 그냥 그렇게 지나쳐버려야 할까? 사람은 언제 환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 고장난 의료계 시스템은 언젠가는 내게도 비극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정말, 정말 그렇게 '내 일 아니고 나도 힘드니까' 무시해버려야 할까?
그녀의 고통은 그녀의 것이었고 누구도 완전히 해결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견뎌내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고 견디지 않기로 한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혼자 괴로워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사수에게, 선배들에게, 동료들에게 조금의 여유와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래서 그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다면. 최소한 잠깐씩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면. 힘들었던 순간들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면. 좀더 자주 그런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다면. 마음을 열고 고통을 털어놨을 때 원래 그런 거라는 대답만이 돌아오는 대신, 잠깐이라도 마음을 어루만져줬을지도 모르는 사람과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다면. 그녀가 데이트 신청에 더 기뻐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면. 그녀와 함께 괴로워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내 일 아니고 나도 힘드니까' 지나쳐버리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는 꺾이지 않았을까?
슈루티에게 이 일은 원래 힘든 거고, 네가 겪는 건 다들 겪은 고통이고,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떠나야 할 거라고 몰이해에 가득찬 말을 내뱉던 사람들이. 또는 그런 말이나 쏘아붙여줬을 시청자들이 입을 다물게 된 것은 그녀가 마침내 꺾였기 때문이다. 꺾이지 않았다면 계속 그랬겠지. 우리는 왜 누군가를 잃기 전에 건져올릴 수 없는 것일까? 왜 사람은 실존을 상실할 때에야 비로소 훼손할 수 없는 존엄성을 획득하는가? 왜 우리는 어떠한 결과에 다다른 괴로움과 외로움만을 합당한 것으로 승인하는가? 왜 우리는 괴로움을 덜어주기는 커녕 함께 괴로워해주지도 못하는 걸까?
이 드라마를 본 이후 3일에 한번은 애덤과 슈루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엄청 많은 것 같지만, 나는 원래 하루에 수만가지 정도의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접히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고 별로 어딘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 혼자 괴롭고 만다.
그래도 계속 생각한다.
고통을 겪는 누군가를 도울 수 없다면 최소한 함께 괴로워라도 해야 한다고. 최소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럴 수가 있다고. 우리는 언제나 그럴 수 있다고...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